부모와 교육에 관련된 글을 쓰다가 문득, 인상적인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왔던.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아이들에 대하여)
부모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가는 관심과 사랑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 관한 부모의 판단은 극히 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경구(警句)는 경구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부모의 생각과 아이들의 현실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관한 유머가 있다.
첫째, 냉장고 문을 연다.(듣는 이는 냉장고 크기를 묻지 않는 게 예의다.)
둘째, 코끼리를 집어넣는다.(코끼리의 크기를 묻지 않는 게 건강에 이롭다.)
셋째, 냉장고 문을 닫는다.(코끼리가 들어갔는지 여부에 관심을 끄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얼추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웃자고 하는 유머가 된다. 왜일까? 논리는 문장이 이치에 맞게 이끌어가는 과정으로, 일정한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이론의 영역이다. 그 논리 과정에서 전제가 의미 없거나 실현 가능성이 없을 때 그것은 이미 논리가 아니라 농담이 된다. 저 3단계는 냉장고의 일반적인 크기나 코끼리의 자발적 의사 모두를 무시하는 무대뽀 정신일 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3 아들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방법은 어떨까? 코끼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첫째, 중3 아들을 주방에 데려다 놓는다.(현실적인 가능성을 묻지 않아야 한다.)
둘째, 아들에게 고무장갑과 주방세제를 제공한다.(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아들이 설거지를 하도록 한다.(이때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집에서 웃고자 하는 농담이 된다. 왜일까? 일단 중3 아들은 자신의 라면을 끓일 때나 갈증을 위해 냉장고 문을 열 때를 제외하고는 주방에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설거지를 위해 주방에머무른다는 것은... 벌써 첫 번째 단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발적 의지가 제공되지 않는 한 중3 아들이 주방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코끼리가 스스로 냉장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역시나 아재 개그 정도의 농담에 불과할 수 있겠다.(물론 자발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극소수의 중3도 있겠지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처음 접했을 때가 고2 때로 기억된다. 그때부터 이 책의 위대함과 칼릴 지브란의 영적인 능력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인간세상의 여러 분야에 혜안을 주는 그의 문장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칼릴 지브란이 지금의 중 2, 3 아이들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있었더라도 저런 멋진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감히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부모의 순수 마인드로 아들을 바라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들에게는 어릴 적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불편했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 시절 농사일은 논밭에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부모들의 노고는 사시사철 계속되었다. 일손 하나라도 보태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을 거쳐왔기에 때로는 어린아이들의 고사리 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고통을 절반 정도는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런 부모들에게 자신의 방조차 정리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신인류가 된다. 자신들을 닮은 이들에게 본능적인 애정을 보여주면서도 아이들의 "방 정리나 설거지"는 분노의 전제이자 과유불급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와 관련된 부모들의 다정한 권유는 아이들에게 말도 안 되는 잔소리로 치부될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공부와 집안일'은 금기어가 되어야 함에도 부모들 입장에서는 계속 입안에서 맴돌고 있는 태풍이 된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부족함이 없어서, 부모의 고생을 몰라서 집안일이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을 비난할만한 특별한 비교대상이 없기도 하거니와 부모들의 헌신과 노고를 눈앞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중3 아들과 공부와 설거지에 관한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인내는 목적을 달성시키지만 조급함은 파멸을 재촉한다"는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1210~1291)의 시구가 떠오른다. 인내심에 관한 한 최고로 유명한 이 문구는 우리 삶의 여러 측면에서 절실하지만, 중3 아들을 공부하게 하고 설거지하도록 설득하는데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겠다. 아무튼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경구는 가까이하고 볼 일이다.
조용하던 거실과 주방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십 대인 누나들과 중3 동생 사이에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엄마나 아빠의 부재중에 누가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부득불 안 하겠다고 버티던 중3 동생은 누나들의 협공에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최소한 자신이 먹은 밥그릇은 자신이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저 결정이 얼마나 지속될까 궁금했다. 우리 집에 평화가 오래도록 깃들기를!
그래, 예전의 엄마 아빠 세대와 지금의 너희들은 모든 게 다르지. 그 다른 면을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중3의 모습만을 기준으로 태도를 말하려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 너희 세대는 다르지. 다르게 봐야겠지. 이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부모들의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싶다. 날이 갈수록 지혜의 속살이 새로 돋아날 기세다.
<예언자>의 문장 뒷 구절이 떠올랐다.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부모로서 아직은 철부지로 보이는 중3 아들에게 바라는 철학적인 소망이 있다면.
첫째, 자신의 삶에 관한 문(門)을 자발적으로 열 수 있기를 바란다.(적어도 방문을 열었을 때 공부하는 모습 정도는...)
둘째, 자신의 인생 로드맵에 관한 계획을 스스로 짜 보기를 바란다.(적어도 책상 정리나 수학 공부는...)
셋째,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기를 바란다.(방학이라고 12시 이후 기상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