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반드시 하고야 마는 세 가지 바보짓

by 지성파파

얼마 전 가수 이적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학자인 박혜란 씨다.


이적의 어머니는 아들 삼 형제를 서울대에 보낸 엄마로 유명하다. 막내가 고3일 때도 뒷바라지 없이 자신의 대외적인 일정을 아주 깔끔하게 소화할 정도로 아이들의 공부에 무관심(?)한 척했다고 한다. 물론 그 엄마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적의 형제들이 봤을 때는 엄마의 쿨한 결정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방치된 고3마저 서울대에 진학을 했다는 일화를 듣고는 많이 부러웠다. '서울대' 진학보다는 오히려 아이들을 ‘믿어주었다’는 사실과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는 그 자체가 부러웠다.


대한민국의 어느 부모가 고3인 자녀를 대학생인 형들에게 맡기고 외국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아이들이 고3이 되면 집집마다 그런 비상사태가 없다. 지구가 우리의 고3들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고 해도 믿어야 한다. 그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부모들에게는 새벽별 보기 운동과 여가생활 포기 캠페인이 자연스럽게 권장된다. 심지어 아이들이 취준생이나 고시공부를 할 때에는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고, 그들의 수발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도 많다.

아들을 판사로 키워낸 선배 부부의 얘기다. 아들이 고시 공부하던 시절 내내 아침저녁으로 자가용으로 광진구에서 신림동 고시촌까지 드나들었음을 고백했다. 아침에는 엄마가, 저녁에는 아빠가. 물론 시험 결과가 좋았다. 미담임에도 그 선배는 5년여 동안 자신의 사생활과 취미활동이 사라졌음을 아쉬워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부모들이 그 자식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상대적으로 "이적의 가정"에서 엄마의 판단은 상상만 해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물론 그 가정과 부모 자식 간의 남다른 사정이 있었겠지만, 부모와 자식들 간에 쌓인 '특별한 신뢰와 정신적 지지'는 여느 집 부모들과 아이들이 본받을만하다. 아마도 이적의 형제들과 엄마인 박혜란 씨의 케이스는 희귀한 전례로 남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이 날것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가 있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키워라.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되 거리를 두어라. 온실 속 화초로 키우지 마라.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하게 하라."

금과옥조 같은 어른들의 조언이지만, 육아를 시작하는 부모들에게는 귀에 쏙 박히지 않는다.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하는 초보 부모들의 마음속에서는 해와 달이라도 따다 줄 성싶은 열정이 늘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아이들이 집에서 자라다 보니 부모들의 관심은 더더욱 소수의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모나 세 가지 바보짓을 하고야 만다.




자식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기


현자들이 묻는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 필요가 있을까요?"


부모들 대부분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할 때 인내심이 바닥을 보인다. 꽃나무나 난을 키워본 이들은 안다. 식물들에게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렇다고 많이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도 안다. 수많은 이들이 화분의 꽃과 난을 죽이는 것은 무관심뿐만 아니라 과도한 물 주기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수분은 식물의 삼투압 작용에서 자신의 뿌리를 약하게 하고 결국에는 뿌리를 썩게 만들어 치유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보다 중요한 농사인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마음이다. 한 세대 전의 부모와 현재의 부모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물질적인 지원'이다. 개인이 노력으로 상쇄할 수 없는 지원 탓에 사회적으로는 '부모 찬스'가 문제가 된다. 기득권자들에게는 이미 부모 찬스가 '능력'으로 환원된 지 오래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이 가진 인적 물적 자산을 총동원해서 아이들의 교육환경 마련에 목을 맨다. 아이들의 경쟁이 부모들의 삶 속에 침투한지는 이미 오래 전의 얘기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스스로 결핍으로부터 배우는 겸손과 배려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더욱이 상위권 대학 진학과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결과가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소한의 결핍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 미성숙한 엘리트들을 길러낸 우리 사회의 부정적이면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성취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가치다. 이것은 남녀노소 연령대를 불문하고 전 생애에 걸쳐서 가져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필요는 있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게 되면 말라죽거나 뿌리가 썩은 화분 속의 식물처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체험을 통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나간다는 배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참세상을 모르는 삶이 될 수도 있다. 돌아보면 안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부모들의 삶도 아이들의 삶도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을.




가정의 중심을 아이들에게 두는 것


현자들이 묻는다.

"한 가정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 게 바람직할까요?"


부모, 아이들, 구성원 모두... 물론 가치관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의사결정의 주체는 가족 구성원 전체가 공동으로 하되, 그 중심은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의사결정 과정에의 참여나 결정권은 존중하되, 결정의 포커스가 아이들에게만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성년이 되어서는 당연히 자율성이 인정되고,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가정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중력을 가진다는 물리학적 전제가 깔려있다. 의사결정권과 책임을 중력이라 표현한다면, 그 중력이 없는 주체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붕괴될 우려가 있다. 가정의 중심을 아이들에게 두다 보면 무게중심의 실종이라는 미지의 블랙홀로 빨려 들 가능성이 많다.


자식들 얘기 빼놓고는 대화가 없는 부부가 많다. 생각해보면 부부가 함께 나누어야 할 대화 주제는 수백수천 가지다. 하지만 가정의 중심을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두다 보면 부모들만의 주제가 사라진다.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면서 양육문제, 어린이집과 유치원 배정, 학교 돌봄, 학원 선정, 대학과 전공 선택, 직업 결정과 취업 과정까지... 아이들의 성장에 관여하다 보면 대략 25년 동안 부모들 자신만의 삶은 실종된다.(물론 한 아이가 태어나서 독립할 때까지 부모의 책임과 역할은 막중하다.)


지구와 달의 관계처럼 적절한 중력은 서로가 필요한 만큼 거리를 유지하게 해 준다.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도는 혜성은 대부분 중력을 잃어버린 위성들이다. 우리의 아이들 또한 자신이 중력을 가진 튼튼한 별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라는 중력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부모가 중심이 되는 가정의 밸런스다.



자식들에게 (그나마) 가진 돈 다 쓰기


현자들이 묻는다.

"최악의 채권자이자 전생으로부터 쫓아온 채권자는 누구일까요? "


모두 자식들이다. 그들이 가진 채권은 '계약'이라는 원인행위 없이 무한정 요구해도 다 퍼줘야 할 지독한 채권이기도 하다. 희한한 것은 채무자로 보이는 부모는 그다지 불평불만이 없다는 거다. 채권자들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재산을 빼돌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일까?


최고의 자식농사는 교육투자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어느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정의 형편에 따라 교육비용을 결정해야 함에도 과도한 투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육투자는 가성비 혹은 수익률이 좋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치동 학원가의 1대 9법칙을 떠올려보시라. 한 명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모두 들러리로 전락한다. 또한 냉정한 경제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한계비용 또는 한계수익 체감의 법칙이나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빛을 발하는 영역이다. 쉽게 말하면 가심비나 효용가치가 높지 않다는 얘기다.

자식농사의 가장 큰 함정은 '과도한 교육투자가 부모의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거다. 수학 학원비만 1억이 넘게 들여 큰 아이를 의대에 진학시킨 후배와 두 아이에게 한 달 500만 원이 넘는 학원비를 냈다는 지인의 얘기는 주위에 흔하다. 이런 케이스가 각각의 형편에 무리가 없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저마다의 사정을 넘어설 때는 부모들의 노후설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부모들이 이 함정 안에 스스로 갇혀있다.


부모가 된 우리가 그러하듯이, 아이들 또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잘된 교육투자라 할지라도 부모의 노후대비에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는다.(우리 스스로가 부모님들의 노후에 큰 도움이 되는지를 떠올려보시라.) 그러기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부모들 스스로가 자신의 형편에 맞는 밸런스를 찾아가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신의 삶에 스스로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서로 간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적절한 관심을 갖되 필요 이상의 관심은 거두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연이 이룬 숲 속 나무들의 거리를 보시라.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수풀이 서로 적정한 공간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숲은 공존의 이유와 공생의 필요를 깨닫게 해주는 배움의 터다.

우리 부모들과 아이들의 가정에도 '숲 속의 황금률'이 자리 잡아야 되지 않을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리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삶 속에 너무 다가가는 것,

아이들의 일상이 부모들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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