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이웃집 강아지의 혀가 늘어진다. 아스팔트에 붙은 껌이 늘어진다. 인간의 육신도 늘어진다. 늘어짐이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고, 늘어짐은 보통 게으름처럼 여겨진다. 그러한 늘어짐이 게으름으로 치부되지 않을 수 있는 계절이 여름이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늘어진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여름이라서 늘어지라고 휴가도 주고 방학도 준다. 이처럼 여름에는 허용된 늘어짐이 있다.
허용된 늘어짐 속에서는 시간도 구멍 난 풍선처럼 푸쉬쉬 늘어진다. 여름날 해변가 모래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눈부신 태양 곁의 옅은 구름처럼 시간이 흩어진다. 여름날 숲 속의 나무 곁에 앉아 고요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무릎 위로 살며시 떨어지는 초록빛 나뭇잎처럼 시간이 떨어진다. 여름방학에 찾아간 외할아버지의 방문 앞, 침대 위로 느린 포물선을 그리며 툭툭 던져지는 화투장 소리처럼 시간이 던져진다. 여름 복날 뜨겁게 익은 삼계탕을 먹을 때 이마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땀처럼 시간이 미끄러진다. 여름날 빠르게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느리게 식어가는 피부처럼 시간이 늘어진다.
그런데 우리 엄마의 여름은 아니 사계절은 한 번도 늘어진 적이 없다. 마치 늘어짐을 허용받지 못한 사람처럼. 내가 어릴 때는 나와 동생들을 가르쳐야 해서, 아빠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에는 가장이라서, 우리 삼 남매가 크고 나서는 아직 일을 할 수 있어서 엄마는 한 번도 늘어질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모두 허용된 늘어짐을 만끽하는 것 같은데, 우리 엄마만이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엄마의 시간을 어른이 된 지금도 늘여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바쁘게 돌아가는 엄마의 시간을 멈추고, 이제 일 그만하라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가끔은 애초부터 내가 할 수 없는 일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각자의 시간은 각자의 것이므로.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엄마의 시간이 이제는 늘어지기를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여름은 늘어짐을 허용한다. 늘어짐이 우리 엄마의 계절에도 허용되기를 아직도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