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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shion MD Jerry Oct 08. 2022

Epilogue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

 가을도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2022년 10월 중순이다. 가을이 막바지 치닫는 이 순간, 필자는 시카고 밀레니얼 파크의 벤치에 앉아서 지나치는 행인들을 보며 시간을 낚고 있다. 조금 이른 아침이라 따뜻한 커피가 필요할 듯하여, 오는 길에 시카고의 인텔리젠시아 커피(Intellgentsia coffee)를 한잔 테이크 아웃한 덕에 필자의 손은 온기로 가득하다. 인텔리젠시아 커피는 아베나 라떼가 시그니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먹는 게 필자의 루틴이기에 과감하게 먹던 대로 한다. 향이 깊어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작은 만족감에 살짝 기분이 좋다. 모두가 분주한 아침에 홀로 차분히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호사를 누려본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3살 아들의 넘치는 에너지에 나 역시 분주함 가득한 아침이었을 것이다. 시카고의 아침이라는 산뜻한 조건 덕에 망상이라면 망상, 공상이라면 공상, 회상이라면 회상.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한다.

 2020년 글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대략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놀랄 만큼 많은 변화들이 오고 갔다. 우선 가까이는 울음소리밖에 내지 않던 필자의 아들이 사고 싶은 것을 자유자재로 사달라고 표현한다. 게다가 논리적이기까지 하다. 말을 늦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주변에서 금방이라던 조언이 어느덧 현실이 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코로나 시대로 인해 해외여행은 물론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했지만, 어느덧 미국에 아무런 검사 없이 올 수 있다. 이제 지인들의 인스타그램에서 국내 여행이 아닌 해외여행의 사진들이 채워지는 것으로 보아 확연히 실감이 난다. 시간과 열정을 바친 신규 브랜드는 경영진의 결정으로 계약 연장에 실패했다. 4년 동안 10억도 안되는 브랜드를 100억 넘게 성장했지만, 그들의 기준에는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나 보다. 필자는 패션시장에서 또 다른 실패를 맛보았다. 경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많이 쓴 실패였다. 그리고 평생 푸른 피로 지낼 것만 같던 필자의 삼성 생활은 13년이라는 숫자를 남겨둔 채 과거가 되었다. 별이라고 불리던 임원이 되어 멋지게 해보고 싶었는데,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적인 타협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달에 회사를 홀연히 나와, 강원도 한 달 살기를 하겠다며 무작정 강릉에 숙소를 예약했다. 13년 동안 채움의 시이 가득해서, 비움의 시이 부족했기에 새로움을 채울 심적인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1달간 지내면서 무조건적인 비움을 하겠다고 무작정 지른 것이었다. 당연히 현실에 대한 걱정도 컸다. 3살의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필자는 외벌이였다. 생업을 내려놓고 나오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정을 믿고 응원해준 와이프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혹시나 필자가 참을성이 부족해서 회사를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인내심 테스트를 하겠다고 설악산 대청봉을 올라가기도 했다. 설악산이 험난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기어서 올라갔다. 설악산을 오르다 보니, 긴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대청봉을 오른 뒤 바로 내려갈 것을 왜 이리 죽을 듯이 올라왔냐는 생각부터 들었다. 힘듦과 괴로움의 순간이 지나고 주변을 둘러보며 찰나의 상쾌함과 쾌감이 주는 낭만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산을 올라오는구나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분명한 건 대청봉 등정을 통해 필자가 인내심 부족의 이슈로 그만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1달동안 거의 매일 아침 따뜻한 커피 한잔과 캠핑의자를 들고 바닷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길에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왜 이렇게 사랑하는 브랜드들이 접혀나가는 것인가였다. 필자도 회사에서 3번의 브랜드를 스크랩당했다. 2개는 흑자가 나는 브랜드였고, 1개는 신규 브랜드였다. 소속된 많은 이들은 열심히 했지만, 어느 순간 경영진의 의사결정으로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 처음 두 번까지는 아직 경영이라는 것을 몰라서라고 생각했지만, 3번째가 되니 필자의 생각이 그들의 방향에 맞지 않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라는 단어를 처음 경험한 것이다. 회사에서 나름 조기 승격과 그룹 파견 등 좋은 프로세스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남겨두고 간다는 아까운 마음보다 오랜 시간으로 인해 나 역시 변해가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오히려 더 컸다. 그렇게 3번째 브랜드가 정리되는 사이에 많은 가족 같은 이들은 회사를 떠나고, 뿔뿔이 흩어졌다. 필자는 홀로 끝까지 남아 브랜드의 마지막을 지켰다. 마무리가 어느 정도 된 후, 나 역시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회사가 말하는 정답은 필자가 찾는 해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회사는 지난 시간 동안 필자가 성장할 수 있는 때로는 차갑지만 나름 포근하고 따뜻한 환경을 주었다. 그러기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나왔다. 무엇보다도 함께 한 많은 가족같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행복하게 회사생활을 한 것 같았다. 이 또한 모두 분에 넘치는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 1달 살기를 하는 동안 지난 시간에 대해 매일 아침 바다를 보며 회상하며 나름의 새로운 계획을 세워나갔던 것 같다. 과거는 감사하되, 이제는 당장의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Here & Now.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단기직으로 일도 하고, 글도 적으며 비워뒀던 공간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회사를 안가면 큰일나는 줄 알았더니, 또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채움이 이어지던 중, 또다시 5년전의 한 순간이 드라마처럼 찾아왔다. 신규 브랜드를 론칭할 때 필자에게 함께 하기를 제안하셨던 팀장님이 찾아 오신 것이었다. 브랜드가 정리되던 시기에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20년을 넘게 다닌 회사를 뛰쳐나가신 뒤 반년만에 다시 뵌 것이었다. 그 역시 퇴사 후 필자처럼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계셨다. 모두에게 우스갯소리처럼 유투버가 되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 채널은 개설 전이지만 곧 하신다고 하셨다. 서로 간의 근황 토크를 10여분 한 뒤 바로 찾아온 이유를 말씀하신다.


 "재욱아, 레미제라블 영화를 봤니? 프랑스혁명에서 남자 주인공을 위해서 대신해서 총을 맞고

  죽던 에포닌이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죽어가는 중에도 행복해하며 한 대사가 있지.

  'A little fall of rain can hardly hurt me.' (비가 조금 온다고 다치지 않아.)

  아직 우리는 조금 비를 맞은 것 뿐인거 같은데... 아직 못해본 것도 많고,,, 다시 한번 해보자."


 다시 한번 필자에게 도전을 이야기하셨다. 그것도 우리가 삼성에서 포기당했던 그 브랜드, 러닝 스포츠 브랜드로 다시 말이다. 처음에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기에 실패를 한다고 평소 생각하는 편이다. 쉬운 길이 아님은 명확한 것이다. 그 제안을 받은 2달 뒤인 지금 이 순간 놀랍지만 우리는 시카고라는 도시에 함께 와있다. 팀장님이라 불리던 분은 어느덧 대표님이 되셨고, 뿔뿔이 흩어졌던 소중한 동료들 중 일부는 다시 재회했다. 그런데 왜 시카고로 왔냐면 말이다. 내일이면, 세계 6대 마라톤인 시카고 마라톤이 시작된다. 참고로 6대 마라톤은 뉴욕, 보스턴, 시카고, 런던, 베를린, 도쿄이다. 이번 시카고 마라톤에 대표님과 한 명의 멤버가 풀코스에 도전한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아직 수준 미달이기에 응원할 예정이다. 내일이면 코로나로 오랜 기간 보지 못한 가슴떨리고 흥분되는, 그리고 장엄한 수많은 러너들의 출발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가슴에 담고 각기 다른 목적으로 우렁찬 총소리와 함께 그들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 설렘의 출발 선상에서 그들과 함께 느끼고 공유할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이 글을 적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에필로그를 적게 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시점에 이런 마무리 글을 적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짧지 않은 데다가 부족한 필자의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이제야 올린다. 아직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그 언제가 우리 모두 해답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2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It's not our abiliti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It is our choices."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의 능력이 아니란다. 우리의 선택이지.)

                                                                   - 「해리포터」 덤블도어가 해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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