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구름 Oct 25. 2021

폴더명은 '집.zip'

스물아홉 번 이사한 프로 이사러가 생각하는 집이라는 세계

 모두 다 그런 줄 알았다. 내 나이에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사계절을 보내고 나면 으레 내가 머무는 공간에 애정을 더 줄지 말지 고민을 한 번쯤 하게 되고, 전세 계약 만료로 두 해가 꽉 채워지기 전에는 누군가와 불편한 통화를 해야만 하는 것이 그저 계절이 바뀌듯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얼마 전, 일과 관련된 증빙 서류를 보내면서 주민등록 '등본'을 제출할 일이 있었다.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 정부 24 누리집에서 버튼을 잘못 눌러 '초본'이 출력되었고, 그날 난 나의 이사 경력을 보며 추억에 잠기다, 문득 책상 앞에 놓인 작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눈물인지 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남편과 이사를 두고 이야기했다. 신혼 초부터 우리가 거쳐 온 집들에 대해 떠올리며 동고동락한 세월을 곱씹었다. 그날은 각자의 이사 스토리를 안주 삼아 이야기가 길어졌다. 길고 긴 밤이었다. 태어나서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무려 스물아홉 번 이사를 거쳐 드디어 내 집에서 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반쪽은 남편 것, 반쪽만 내 것이다. 부부 공동명의의 아파트를 결혼 후 13년 차에 계약하 까지 참 오래, 아니 많이 걸렸다. 이 집을 단 10분 만에 계약하고 1년 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의 이사 경력을 바탕으로 '집 보는 능력'여지없이 발휘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어나서 분가하기 전까지 또는 사회 진출하기 전까지 한 손에 꼽을 만큼 비교적 덜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태어난 집에 살다가 결혼 때 한 번 옮긴 집에서 계속 사는 사람도 있고, 어쩌면 한 해가 되기 전에 옮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스물아홉 번의 터를 옮기면서 나도 스물아홉 번은 철이 조금 든 것 같다. 그 변화는 성장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하고, 실패를 딛고 일어난 작은 동기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내년에 다시 이사해야만 하는 상황에 닥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이렇게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석 장 짜리 빼곡한 이사 경력이 적힌 초본, 그 줄글들이 이력서라면, 나는 지금부터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한다. 희로애락만으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감정이 교차하는 날들에 머물렀던 나의 집들. 그리고 그 파일을 함께 열어 줄 당신이 있으니 설레면서 편안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 글을 읽어주실 당신께서도 당신이 머무는 공간을 좀 더 사랑하길 바라면서 폴더를 연다. 폴더명은 집.zip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