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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Dec 15. 2021

우리에겐 이야기가 필요해요

나의 생각과 말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바로 나다. 거짓은 진심을 담지 못한다. 진심이 없는 말은 힘을 잃고 사라져버린다. 진심의 말을 갖지 못한 이야기는 시간 보다 더 빠르게 탄압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진심의 말을 가진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어 사랑받고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글을 통해 그리고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이곳 저곳에서 숨죽였다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만나야 한다. 살아 있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주 슬픈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어둠 속에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 <중략>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바꾼다.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나부터 새롭게 바뀌고 싶다. 나의 누이는 너의 누이가 되고 나의 전투는 너의 전투가 되고 나의 늑대는 너의 늑대가 되고 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리고 다음번에는, 우리 정말로 더 잘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중 -





코로나 때문에 수강 기간에 공백이 좀 있긴 했지만 한글 서예도 오늘부로 한 해의 마침표를 찍었다. 꼬맹이 그림책을 두어권 별려서 도서관을 나섰다. 서예 재료와 그림책 무게가 꽤나 무겁게 느껴졌다. 수업시간 외에는 제대로 연습한 기억이 없으니 출석횟수만 우수할 뿐 실력은 멈춰 선 시계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거리에 서있는데 토스트의 맛좋은 냄새가 팔짱을 끼고 살살 데려간다. 햄치즈 토스트를 두 개 주문하고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데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벽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페인트칠에 엉겨붙은 전선들이 정돈 없이 대충 걸려있고 그 위에 오래된 프라이팬을 이용해 만든 시계가 째깍째깍 시간을 돌리고 있었다. 내 시간을 끌어가고 있는 녀석이 저기 있었네. 훗.


토스트를 가끔 사먹으면서도 가스 벨브 옆에 있는 작은 액자며 벽에 걸려 있는 개성있는 시계는 오늘 내눈에 처음 들어온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다며 찌그러진 누런 냄비로 만들면 더 예쁘다며 말씀하시는 사장님 얼굴에 마스크를 넘어 미소가 번졌다. 음식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둥그런 벽시계가 걸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신경써서 살펴보지 않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그곳에 사장님의 멋진 작품이 걸려있었다. 사장님은 말씀 없이 토스트만 만들다 '나', 바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겨 간만에 신나셨을 거다. 뜬금없기도 하겠다. 알순없지만 오늘 사장님은 아주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사장님 저 시계 사진 좀 찍을게요. 네에, 그러세요.



대화는 인생의 다른 어떤 행위보다도 감미롭다. 따라서 만약 지금 내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눈을 버리고 귀와 혀를 선택할 것이다. <중략> 책을 통한 공부는 차분하고 평온한 것이어서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못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단련해준다. 강한 정신을 지닌 만만찮은 상대와 논쟁할 경우, 상대는 내 옆구리를 누르고 좌우로 찌르며 자기 사상으로 내 사상을 자극한다. <중략> 우리의 정신은 건강하고 성숙한 정신과의 교제를 통해 강화된다. 나약하고 병약한 정신과의 지속적인 왕래는 우리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퇴화시킨다. 그것만큼 잘 퍼지는 전염병은 없다. - 몽테뉴, <수상록> 중 -




40년만에 붓을 들었다는 어르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분은 오늘 서예 수업 시간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어디를 바삐 가셔야 하는 듯했다. 바로 옆 전시관에서 사진 전시를 하고 있다며 오늘 본인이 지킴이로 당번을 서야 한다며... 워낙 목소리가 크신 분이라 어르신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고도 남았다. 저 뒤에서 조용히 글씨를 쓰시던 분이 일어서며 "전시회나 보러 갑시다." 말씀하신다. "그럼 저도 따라가 볼까요?" 하고 은근히 일어나 뒤따랐다. "어허허허, 그래요 그럼. 갑시다." 어르신 신나서 밖으로 나가신다. 정말 신나게 걸으신다.



어르신은 35년간 사진을 찍으셨다고 했다. 촬영의 기술이 잔뜩 들어간 사진이며 자연적으로 불분명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사진이며 다양한 구도의 사진들을 수도 없이 찍으셨다고 했다. 웹하드에 수천장의 사진이 있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건 자연만큼 정직한 것은 없고 또 그 정직함을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프레임에 담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미학이라 아주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작품 설명을 듣던 우리들은 어르신의 이야기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하나의 사진을 찍기 위해 수없이 기다려야 했던 경험담이며 자작나무의 흔하지 않은 풍경을 얻기 위해 근처에서 숙박을 하며 머물렀던 이야기들은 사진 한장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닌 어르신의 인생을 구하기 위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머어어어얼리 가리키기도 했고 숨죽여 기다릴 때는 가래가 목구멍에서 끓는 것처럼 소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그 이야기에 담긴 진심이 그리고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가 40년만에 붓을 처음 들었다며 쑥쓰러워 하시고 안절부절못하시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느껴져 마치 다른 사람을 대면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어르신과의 대화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으로 행복하신 80대 아주 젊은 어른을 만난 것 같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셔서 아주 간단히 소개를 했더니 어르신은 조금만 더 어렸어도 자신은 대학에 들어갔을 거라며 행복을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누르기 위해 건강관리에도 힘쓰신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토스트 가게 벽에 걸린 프라이팬 시계며 어르신의 사진 작품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아무 성과도 없이 이번해가 끝나는 것 같아 허전했던 내게 청량감을 느낄 수 있는 탄산수처럼 시원했다. 우린 가끔 이야기가 필요하다. 진심을 담은 그런 이야기 말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오늘의 대화는 그 어떤 행위보다도 감미롭고 시원했다. 어느 공간에든 작품이 놓일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싶다 생각했다. 어르신의 열정을 닮고 싶다 생각했다. 35년을 지속시킬 그 힘 말이다. 재미있게 나이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다시 확인했다.



#진심이담긴이야기는나를변화시킨다

#35년을지속시킬수있는열정을갖고싶다

#재미있게나이들고싶은나의작은소망을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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