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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빛 바랜 꿈

외부세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교복을 입은 청년은 자동차 범퍼에 걸터앉아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자유로워 보였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었고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온천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사진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행증이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는 조선 사람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 신세라며 ‘너희가 어른이 될 쯤이면 세상 구경하는 날이 올까?’ 하고 혼잣말을 하셨다. 어린 나는 하얀 구름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며 저곳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중학교 시절, 세계지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동남아의 어느 나라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나라는 바나나가 얼마나 크고 맛있는지 여러분 머리만 합니다. 그곳 수박(멜론, 망고, 등)이 여러분 머리만 합니다.”

선생님은 당신도 가본 적 없고 맛본 적 없는 남쪽나라의 신비를 ‘사람의 머리만큼이나 큰’이라는 가늠하기 애매한 형용사로 설명하곤 했다. 당신으로써는 먼 나라 이웃나라에 대한 동경의 최대치를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자라면서 바나나, 수박, 망고를 본 적 없는 나는 내 머리만큼이나 큰 과일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맛은 어떨까 궁금했다.

나에게 세계여행은 오래되어 빛이 바랜 간절한 꿈이었다.


하나원을 나오고 2006년 가을 즈음, 어느 교회의 비전드림 수련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꿈에 대해 장황하게 설교하던 강사가 참가자들에게 앞으로 10년, 20년 이후 자신의 꿈을 적어보자고 말했다. 나는 ‘꿈을 말한다고 현실이 돼? 글로 박아놓는다고 이뤄지냐고’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강사가 내민 종이에 “10년(20년)후 나의 목표” 4~5가지를 써내려갔다. 

     

 1. 2015년,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간

 2. 2020년, 세계여행 다녀오기

3. ...     


그리고 잊었다. 그때 들었던 강의도 잊고 꿈도 잊었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 목표였으니 잊히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때가 기억 난 시점은 신기하게도 2019년 6월, 유럽여행이 한창이던 프랑스 남부에서였다. 나는 ‘아를’에 거점을 잡고 이웃도시 ‘셋드’로 가는 기차에서 차창 밖 풍경에 흠뻑 빠져있었다. 유럽 하늘은 무슨 바람이 불기에 이리도 파란 걸까, 드넓은 평야에 심은 농산물은 무얼까, 멀리 지나가는 농가 너머에는 무슨 세상이 있을까. 기차도 흘러가고 생각도 제멋대로 흘러가던 그때 문득 낯선 기억이 말풍선처럼 떠오르더니 점차 선명해졌다.

2006년 가을 비전드림 수련회에서 꿈을 쓰던 장면이었다. 그때 쓸데없는 헛짓이라고 툴툴거렸었는데... 그때의 꿈을 내가 지금 이루고 있는 건가? 신기했다.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해 바람에 날려버린 글자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대나무 뿌리처럼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가슴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8년 즈음부터 세계여행을 향한 오래된 꿈이 싹이 트기 시작했다. EBS 교육방송에서 방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 여행기가 자꾸 눈에 들어오고 심심할 때마다 인터넷에 비행기 티켓 가격을 검색하고 호텔을 검색하며 조금씩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생활비를 아끼고 여행경비 저축을 시작했다. 

여행은 ‘어느 나라에 갈까?’로 시작이 된다. 여행을 상상할수록 가고 싶은 나라는 많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점점 늘어났다. 산, 바다, 유적지, 문화중심지 등 여행지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교통수단(비행기, 기차, 버스, 배, 렌트카 등) 비용을 알아보고 숙박, 음식 등 하루 지출비용까지 예상금액을 따져보았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2019년 1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지로 유럽(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을 선택했다. 단체관광이 비용을 절감하고 안전해 보였지만 그보다는 내 리듬에 맞는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계획하다 보니 네이버와 구글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구글 지도와 네이버 검색창은 초보 여행자인 나에게 훌륭한 스승이 되고 말 없는 길 안내자가 되었다. 이 두 사이트만 있으면 세상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요즘은 여행 관련 앱들이 다양해서 항공, 숙박, 관광지 티켓, 액티비티 등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한국어로 제공되어 굳이 영어나 현지 언어를 하지 않아도 앱 사용이 편리하다. 

한국에서 쓰지 않던 구글 지도 앱은 유럽 어디를 가든 친절한 안내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공항, 숙소, 주변 관광지, 등 원하는 곳을 찾아가는 대중교통 방법과 교통비 정보가 제공되고 주변의 관광지도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두렵고 어려웠던 점은 언어였다. 길을 잃는 것도 두렵지 않고 배를 곯는 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언어가 제일 걱정이었다. 영어는 중학교 2학년에서 일찍 포기한 상태여서 ‘This is a pen.’ ‘I love you.’ 정도가 기억의 전부였다.

언어를 어떻게 극복할까 고민 끝에 3개월 동안 인터넷 기초 여행영어강의를 달달 외웠다.     

나는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이다. 이번 여행도 첫 도착지와 호텔을 정하고 다음 목적지와 호텔까지만 예약하고 여행을 떠났다. 그다음은 여행 현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내 멋대로의 여행을 기다렸다.

긴 기다림과 노력 끝에 드디어 2019년 5월 22일, 인천 국제공항을 출국해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꿈은 씨앗이다. 꿈은 사람을 단련하고 성장시키고 사람의 본성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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