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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엄마'의 역할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는 딸은 기어이 얼굴을 내어주지 않는다. 뒷모습에 만족하는 수 밖에...


27살에 어렵게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지 일주일 만에 딸은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후 40일부터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도망자 신분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나는 쫓겨나듯 북경으로 도망갔다. 그 후로 1년에 겨우 한번 딸을 만날 기회가 허락되었다.


남한에 입국한 후, 딸을 내 품에서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는 ‘재산포기각서’ ‘양육비 포기각서’를 쓰고야 딸을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 딸아이 아홉 살 되는 해 1월이었다.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앞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아이가 ‘엄마’를 부르지도 못하고 달려와 얼굴을 묻었다. 자라면서 할매, 할배, 아버지만 알았으니 엄마라는 말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딸은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아이를 데려오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키워야할지 앞이 막막했다. 우리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웠지?

엄마는 먹고사느라 바빠 자식들 교육은 신경도 못쓰고 3남매를 건강하게만 키웠다.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책가방을 던지고 노느라 신났고 숙제 검사가 두렵긴 했지만 노는 재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과외나 학원교육을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엄마 아버지에게 받은 집안 교육이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말하면 안 돼, 어른이 숟가락 들기 전에 먼저 먹으면 안 돼. 어른을 공경하고 인사를 잘해야 한다’ 였다.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단단히 혼이 났다.


하지만 이곳은 북한이 아니고 내가 받은 교육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드라마에 나오는 남한 엄마들은 자식들 교육에 사활을 걸던데 무슨 과외를 시켜야 되나. 나는 교육을 받은 경험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역사회복지센터에서 진행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방과 후 교육이 전부였다. 딸도 나도 남한사회가 낯설고 엄마와 딸 역할도 처음이어서 하루하루 정착하는데 숨이 찼다.


15살이 되니 어김없이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 시기가 나의 우울증과 겹쳐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우울증을 앓느라 힘겨웠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울던 딸이 3학년을 졸업하더니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선택했다. 내가 보기에도 딸은 공부에 뜻이 없어 보였다. 나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니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3년 동안에 네가 좋아하고 하고 싶고 잘하는 것을 찾아보라는 과제를 던지고 용돈을 끊는다고 통보했다. 기특하게도 딸은 햄버거가게에서 일하며 스스로 용돈을 마련하며 돈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 검정고시도 두 번 만에 통과했다.


사춘기가 지나던 시기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한국에 온 게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아. 나 한국에서 교육받게 해줘서 고마워.”

가슴이 뭉클했다. 혼자 딸을 키우느라 고생은 했지만 헛되진 않았구나 싶었다.


또 언젠가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엄마에게 매 맞은 게 지금도 이해가 안 돼. 내가 잘못한 게 있어도 어떤 날엔 그냥 넘어가고 어떤 날엔 심하게 혼내고 때렸잖아. 엄마는 밖에서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집에 와서 나한테 화풀이 했어. 그게 너무 억울했어.”

가슴이 섬찟하고 미안했다.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엄마는 잘못하면 맞아야 된다고 교육받으며 자라서 너를 심하게 다그쳤어. 근데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너에게 푼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딸의 말이 맞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살 부대끼는 애착관계 없이 9살에 불쑥 만난 ‘엄마’라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다그치고 명령하고 혼내기 바빴으니 아이가 느꼈을 배신감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내가 보기에도 불량한 엄마였던 나는 왜 그리 성급하고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깜깜한 동굴 안에서 벽을 더듬듯 두렵고 무지한 것 투성이였다.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조금 느린 아이, 이 아이가 부딪힐 세상에는 어떤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까.

딸은 내 성격을 많이 닮아 느리고 생각이 많고 고집이 세다. 모녀 사이가 애증 하는 관계여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할퀴고 미워하고 원망도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건 이렇고, 엄마는(너는) 왜 그래.’ 때로는 옛날 옛적에 억울했던 감정까지 끌고 와서 그때 너무 힘들었다고 울며 성토한다. 같이 울고 소리 지르고 온 감정을 쏟아내 싸우다 보면 때론 오해가 풀리고 묵혀두었던 감정의 응어리가 해결되기도 한다.

달라진 점은 아이가 어렸을 땐 우격다짐으로라도 엄마가 이겼는데 이제는 딸의 주장과 논리에 밀릴 때가 많다. 말로는 이길 수 없어 분하고 억울할 때면 “딸아, 엄마가 나이 들고 생각이 모자라서 그래.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젊은 네가 좀 이해해줘.”하고 사정할 때도 있다.


중학생이 될 즈음부터 나는 딸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엄마의 역할은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주고 교육하고 보호하는 거야. 엄마의 책임은 딱 거기까지야.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성인이 되면 독립해야 돼. 그때부터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21살, 딸은 진짜로 독립을 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무언지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스스로 돈을 벌고 통금 제한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더니 연애도 하고 실연도 겪으면서 조금씩 인생을 배우고 있다.


딸이 엄마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도 이젠 연애 좀 하고 엄마 인생을 살아.”

잘 자라준 딸이 대견하고 미안하고 너무 일찍 내 손을 떠난 자식을 붙잡고 싶기도 하다. 함께 있을 땐 사랑하고, 미워하다가 멀리 떠나고야 그리워하는 우린 모녀 사이이다.


자식을 키우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답이 다를 뿐. 내 인생의 답을 내가 발견해야 하듯 그 아이도 자기만의 답을 찾아갈 것이다. 이제 ‘엄마’로서 나의 역할은 자기 인생 살아가는 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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