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떠난 간 모든 아름다운 것들

슬픔의 위로

by 무비 에세이스트 J

비포 선라이즈의 너무 젊은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들이 더 이상 저렇게 젊은 모습으로 해맑게 웃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새삼 처연하다.


내가 지나오며 뒤에 남겨놓고 떠나온 것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젊음, 나의 사랑, 나의 열정, 나의 에너지.

그리고 또 무엇을 나는 떠나보내고 지나쳐왔을까. 늘 걸으며 지나치는 골목조차 조금씩 변해가며 나의 오늘에 다름을 주는데 정작 나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매일매일의 변화에 대해서 나는 무서울 만큼 둔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당연히 한 곳에 있던 약국이 문을 닫았다. 그 약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던 곳이었기에 오며 가며 필요한 것들을 사고 약사부부와는 인사도 나누곤 했었는데, 어느 날 문을 닫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과는 다른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이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셔터가 내려진 그 약국 앞을 쉽사리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별은 여기서도 벌어지고 있구나.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 또다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우리 가족을 알고 나의 할머니를 기억하고, 나의 보다 어린 모습을 알던 그 부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저 나의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떠나왔던 모든 것들처럼. 그리고 언젠가는 그 약국의 모습도 그 안에서 일하던 약사부부도 희미하게 잊혀질 것이다. 나를 떠난 이들이 나를 잊듯이.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두려움 없이 자신을 열어 보이던 배우들도 이제는 50대가 되었고, 영화 속 그들의 대책 없는 하루 일정을 부러움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던 내가 어느새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와 무심하게 곁눈질하듯 보는 걸 보며, 내가 떠나온 길이 꽤 길구나 싶다.


나의 가슴속에 생긴 이 근본 없는 아림은 그저 나이와 세월 탓만은 아닐 텐데 나는 무엇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 것일까.


젊음은 한시적이지만 그 시간들이 갖는 힘은 거대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강력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다. 무모한 용기도 무책임한 낭비도 한없는 방황도 젊음이라는 용암 속에 한 덩어리로 용해되어 강렬한 열기를 뿜어낸다. 그 열기에 도취되어 어딘가로 표류되어 가지만 젊음이라는 에너지에 취해 걱정도 슬픔도 이내 사그라지고 새로운 용기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것 또한 젊음이다.

내가 속해있는 곳에서 난 참으로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 모두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나는 늘 두 방향을 연신 번갈아보며 혼란스러워했던 것 같다.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 미련과 두려움. 후회와 설레임의 가운데에 서서 선택을 망설였던 나는 이제 내 앞에 놓인 생을 향해 걸어가기로 한다.


떠나간 사랑 때문에 시작된 이 많은 고민과 생각들은 결국 나를 향해 밀려들었다. 이미 떠나버린 것들이 비워놓은 자리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아 그 무엇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자니 남아있는 내 삶이 서럽다 한다.

떠나간 모든 것들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손 뻗치면 닿을 것 같은 생생한 기억은 그 기억을 잃을까 어리석도록 두려워하는 나를 살포시 밀어준다. 그 기억은 이미 과거의 생을 채우고 있다고. 이미 나의 생을 채우고 있으니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의 어깨를 토닥인다.


슬픔의 위안은 때로 기쁨보다 막강하다. 슬픔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탄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떠나보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그 시절은 이렇게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자연스레 앞을 바라본다. 다가올 나의 시절에 인사를 건네본다. 이렇게 또다시 시작된다.

keyword
이전 02화문리버(Moon R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