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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버(Moon River)

늘 찾아오지만 한 번도 같은 적 없었던 나의 여름에게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침실에 들어올 때마다 미리 에어컨을 켜 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열기에 한참 시달린 것 같은데, 어느새 창문만 살짝 열어두고 선풍기만 돌려도 시원할 정도로 계절이 바뀌어 있다. 살짝 열어둔 창문 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어온다. 가을이 조만간 찾아올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여름에 매달리며 발걸음을 늦추었는데 말이지.


저녁 식사 이후 낮과는 또 다른 황홀함이 배어있는 밤하늘을 보며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짧은 산책에 나섰다. 낯익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다가 가로수가 쭉 늘어선 대로변으로 나와 걷고 있자니 몸서리 쳐지도록 가을이 실감되며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물론 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이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단순히 나이라는 이유를 뛰어넘는 이유들로 순간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것 같다.


나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현재라는 시간의 크기와 무게를 알기 위해 가능하다면 시간을 10년 뒤로 보내보고 싶어 진다. 무엇이 달라질까. 시간이 10년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달라질 일은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와 외숙모가 살아계실 거라는 거다. 그 밖에도 온 집안의 귀염둥이인 조카가 태어나기 전일 거고, 주변의 많은 기혼자들이 순식간에 미혼 상태로 돌아가 지금 그렇게나 그리워하는(가끔씩....그러나 강하게) 싱글 상태를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시는 나의 엄마, 아빠 역시 무릎 수술 전의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나 역시 피래미 직장인으로 고생 고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10년이 뭐라고 이렇게 많은 일들이 바뀌냐 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의 길이가 새삼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앞으로 다가올 10년 후의 일들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지나간 10년을 생각하니 현재라는 시간을 마냥 허덕이기만 하면서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10년 전에 써두었던 블로그 글들 속 나의 고민과 희망 중 많은 것들이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음을 발견하고 또 한 번 숨이 턱 막힌다. 자책의 파도가 공포스럽게 밀려든다. 이렇게 가는 건가 싶다. 하... 싫다.


이렇게 가을이 코앞까지 와서 스산함을 느끼는 계절이 되면 예전에 보았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가 어김없이 떠오른다. 거의 매년 이 즈음해서 생각나는 걸 보면, 어쩌면 이 에피소드가 떠오르기 때문에 초가을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몇 장면들은 나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비슷한 상황과 계절이 되면 끊임없이 떠오르는데 시즌 4의 최종회가 그중 하나이다. 에피소드의 시작 자체가 주인공 캐리의 이런 대사로 시작된다.


여름도 다 갔고 공기는 차갑다. 실로 오랜만에 침대에서 덮을 담요를 꺼낸다.


한 여름을 어느새 보내고 나도 모르게 발치에 밀어둔 얇은 이불을 덮을 때마다 나는 저 장면과 대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주인공 캐리와 미스터 빅이 한밤중에 LP판으로 문리버를 들으며 그 리듬에 맞추어 트위스트를 추던 장면이 자동으로 연결되어 떠오른다. 미드가 담고있던 그 스산함과 주체가 안될 정도의 낭만적인 기운들이 내가 여름의 끝, 가을의 입구에서 정확히 느끼는 바이브이고 감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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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더 시티 시즌 4 마지막 에피소드에서의 캐리와 빅


그 장면을 물들여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으로 만들어준 노래 문리버. 미드에 나오는 대로 헨리 멘시니 버전의 문리버를 들으며 멜로디와 가사에 취해본다. 문리버란 단어 그대로 달빛이 비쳐있는 강물을 의미한다. 가사를 듣고 있자니 전에 없던 생각이 든다. 영화 속 문리버는 고향에서 보았던 친근하고 그리운 친구 같은 존재로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 세상에 나아가는 존재지만, 나의 삶에서 실제로 지난날에 보았던 문리버는 내가 찾은 그날 그곳을 지나가버린 문리버였을 뿐이라는 생각, 앞으로 단 한순간도 그때 내 앞을 지나던 그 강을 만날 수가 없다는 생각, 심지어 하늘에 늘 떠있어서 나를 잘 알 것만 같은 저 달조차 10년 전 그때 그대로는 아닐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여름이 그렇게나 아쉬웠나 보다. 2021년에 나를 찾아와 주었던 이 여름과, 이 여름을 살아가면서 내가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꼈던 모든 것들은 그렇게 고이 2021년에 묻어놓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여름은 또 오고 또 가고 또 오고 또 가고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역시 오가고를 반복하는 그 여름들을 맞이하고 보낼 것이다. 작은 바램이 있다면 그 모든 여름을 부디 설레임으로 맞이해서 뿌듯함으로 작별하고 싶다는 것이다. 뒤따를 가을이 부러워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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