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와이너리 '포트 와인 투어'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사실 포르투는 나에게는 별로 인상적인 여행지는 아니었다. 비단 숙소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당과 오래된 건축물, 낭만적인 강변과 야경, 아기자기한 카페와 상점, 미술관과 박물관, 전통 시장 등 갖출 건 다 갖췄는데 평범했다. 아기자기한 고풍스러운 매력을 들자면 스페인 톨레도 Toledo나 이탈리나 시에나 Siena처럼 중세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들이 나았다. 로맨스를 꿈꾸게 되는 낭만은 체코 프라하, 시끌벅적한 강변은 런던 템즈 강이 떠올랐다. 조금만 알려진 곳이면 오버투어리즘 때문에 관광지든, 식당이든 사람에 치이는 일에는 염증이 났다. 나는 시야가 널리 확 트이는 광경을 좋아하는 편인데 포르투는 대체로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에 잘 왔다고 느낀 강력한 한 방이 있었다. 바로 ‘포트 와인 투어’였다.
별 기대 없이 참여한 포트 와인 투어는 무척 유익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람을 마친 후 야외 정원에서 포트 와인 2종을 시음할 수 있었다. 달콤 시큼한 포트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적신 순간 마음고생으로 우울했던 감정은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와인 한잔하면서 담백하고 부드러운 빵을 먹는 자체로 행복했다. 포트 와인 한 모금이 선사하는 즐거움 맛보기.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도 포르투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금강산도 식후경, 역시 진정한 여행은 식도락이 묘미이다. 좋은 인연과 맛있는 음식이 함께라면 여행은 더 풍성해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내가 간 곳은 테일러 와인 하우스 Taylor's Port Wine House였다. 하나 같이 유명한 샌더먼 Sandeman, 카렘 Cálem, 크로프트 Croft, 그라함 Graham 등을 두고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테일러가 여행서에서 가장 처음, 제일 크게 소개돼 있고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보는 풍경이 멋있다고 하길래 가기로 결정했다. 정작 레스토랑에는 들르진 않았지만. 고민하며 결정을 내릴 때와 막상 행동으로 옮길 때 마음은 때때로 다른 법이다. 리스본에서 상 조르주 성에 갈 때처럼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을 헤매다가 또 겨우 맞는 길을 찾았다. 길을 늘 헤매면서도 결국 목적지를 잘 찾아가는 스스로가 신기하고 대견하다. 인생도 이처럼 단순하면 좋으련만.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너무 고생하지 말고 조금만 헤매다가 잘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하철을 타고 동 루이스 1세 다리 Ponte D. Luís I를 건너서 모후 공원 Jardim do Morro에서 내렸다. 대로를 따라 걷다가 길이 있을 법한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계속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잘 모르면서 꼼수를 부리기보다는 정석대로 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편한 법이다. 일단 와이너리가 밀집해 있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 도루 강변에 가면 각 와이너리로 가는 표지판이 잘 안내돼 있다. 표지판 방향 대로 골목을 따라 쭉 들어가다가 언덕길을 오르면 테일러 와인 하우스가 보인다. 이제 포르투갈에서 어지간한 언덕길을 마주치더라도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포르투갈에 산다면 스쾃 없이도 하체는 기본적으로 튼튼할 것 같다.
사람이 같이 다니면서 안내를 하는 투어는 아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전문용어까지도 설명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관심 있는 지점에서 오디오 가이드로 상세한 안내를 받았다. 포트 와인의 역사, 포도 품종과 재배 방법, 포트 와인의 제조 과정, 테일러 와이너리 역사까지 배울 수 있었다. 주원료인 포도 품질에는 일조량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같은 재배지라도 밭이 계단식인지, 완만한 언덕 형태인지 등에 따라서도 미세한 일조량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더 품질 좋은 포도를 생산하고자 끊임없이 이 방법, 저 방법 시도 끝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늘날에는 대형 기계로 포도를 으깨지만 옛날에는 라가르 Lagare라고 하는 화강암으로 만든 네모난 발효조에 포도를 넣고 사람들이 일일이 발로 밟았다. 이벤트처럼 현재도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제조할 때면 사람들이 모여서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면서 포도를 밟곤 한다.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서로 돌아가면서 작업을 이어가는데 그 모습이 무척 흥겨워 보였다. 설명에 푹 빠져서 몇 날 며칠 도루 강 계곡을 따라 와인 농장을 방문하는 투어를 꿈꾸게 되었다.
투어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서늘한 대형 저장고에서 숙성 중인 오크통들이다.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호기심 넘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오크통 사이를 괜히 요리조리 왔다 갔다 했다. 숙제하기 싫을 때 오크통 구석 어딘가에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께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철없고 해맑던 10대 때 친구들과 왔다면 여기저기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쫓겨났을 것이다. 1692라는 전통을 강조한 설립연도와 고급스러운 테일러 로고가 새겨진 거대한 발세이루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했다.
포트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달콤하고 알코올 도수는 18~20% 정도로 높은 편이다. 일반 와인은 8~13% 정도이다. 포트 와인이 우연히 발견된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만들어진 계기가 흥미롭다. 영국은 프랑스와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와인을 수입할 수 없었다. 대신 포르투의 질 좋은 와인을 수입했으나 배에 실어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맛이 변질되었다. 대안으로 발효 중인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 와인이 상하지 않도록 했다. 포도주가 완성되기 전 숙성을 중단하고 도수가 높은 술을 추가하기에 포도의 당분이 전부 알코올로 분해되기 전 제작이 끝난다. 한편, 영국 상인이 포르투에서 와인을 구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포르투갈 뱃사람들이 먼 바닷길을 떠나면서 와인을 잘 보존하고자 만든 방법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우연한 계기로 일반 와인보다 더 달고, 도수는 더 높은 독특한 포트 와인이 탄생했다. 항구 도시에서 수출을 하다가 만들어진 와인에 ‘포트 Port’라고 항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포르투에서 생산한 와인이라는 의미겠으나 역사적인 상징성이 느껴졌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포트 와인은 루비 Ruby와 토니 Tawny다. 루비는 이름처럼 짙은 붉은색인데 가장 저렴하고 많이 생산된다. 2만 리터에 달하는 거대한 통인 발세이루에서 숙성을 하고, 콘크리트나 스테인리스강 탱크에서 보관한다. 비교적 나무와 적게 접촉을 해 산화가 덜 일어난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에 과일 향이 강하고 맛이 진한 편이다. 토니는 황갈색을 띤다. 오크통에서 숙성을 하기 때문에 미세한 구멍으로 산소가 들어와 산화된다. 색이 적갈색을 거쳐 점점 금빛을 띠다가 옅어진다. 오래 숙성할수록 과일 맛과 향이 옅어지고 복합적인 풍미가 살아난다. 더 달고 진득한 캐러멜이나 구운 견과류 맛이 난다. 증발해서 사라진 만큼을 ‘천사의 몫’이라고 부른다. 천사의 몫을 나누고 완성된 와인이라니. 왠지 천상의 맛이 느껴질 것만 같다. 10년, 20년, 30년, 40년 산 등을 볼 수 있다.
루비 와인 중 ‘빈티지 Vintage’와 ‘LBV(Late Bottled Vintage)’ 라벨이 붙어 있는 와인은 고급이다. 빈티지는 최상급 포트 와인이다. 이례적으로 품질이 좋은 포도가 생산된 해에 특정 포도밭에서 수확한 한 가지 품종으로 양조한다. 2~3년 정도 오크통에서 숙성 후 병에서 10~40년가량 숙성해서 마신다. 전체 포트 와인 시장에서 2% 정도를 차지한다. LBV는 처음에는 빈티지를 생산하려고 양조했으나 수요 부족으로 병에 담기기 전 발세이루에서 4~6년 정도 숙성한 와인이다. 이름처럼 늦게 병입 된 빈티지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빈티지 포트와인 맛을 느낄 수 있다. 브랑쿠 Branco는 백포도주이다. 헤제르바(Reserva, 리저브)는 주로 프리미엄 루비 와인을 일컫는다. 다양한 해에 수확한 고품질 포도로 만든 와인을 블렌딩 해 오크통에서 5~6년 숙성한다. 토니나 브랑쿠로 만들 경우, 헤제르바 토니, 헤제르바 브랑쿠로 따로 구분한다.
주량은 약하지만 술 투어는 언제나 즐겁다. 술에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 지리적 조건, 역사와 지역민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야외 정원에서 마음 편하게 도수가 높은 달달한 와인을 마시니 나른해졌다. 역시 본고장에서 마시는 술이 제 맛이다. 포트 와인은 도수가 높아 원래 작은 잔에 나오는데도 다 마셨다가는 숙소까지 기어가는 민폐를 보일까 싶어 자제했다. 여러 명이 갔으면 2003년 산(75cl €140, 37.5cl €72)이나 1997년 산(75cl €165, 37.5cl 미판매) 빈티지나, 20년 산 토니(75cl €44, 37.5cl €25)를 한 병 시켜서 나눠먹었을 텐데…… 혼자이고 술이 약한 덕분에 십만 원을 아낄 수 있었지만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