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상징, 아줄레주
파스텔톤 벽면 아래쪽 전체가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다채로운 문양을 그리고 있는 타일들로 장식되었다. 알록달록한 넓은 접시들은 액자 대신 한쪽 벽면에 삼삼오오 설치돼 인테리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나무 장식장 위에는 붉은 볏을 꼿꼿이 세운 수탉 모형이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 테두리는 기하학적 무늬로 치장되어 있다. 겉면이 울퉁불퉁한 커피잔은 벽면 아래처럼 푸른색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타일과 무늬 덕분에 전체적으로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다. 아늑하고 따뜻하다. 포르투갈에 가기 전까지는 편안하고 포근한 인테리어는 모두 북유럽 스타일인 줄 알았다. 타일과 기하학적 패턴으로 만든 소품과 장식은 포르투갈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도시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아줄레주 Azulejo’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윤이 난 돌’이라는 뜻인 아줄레주는 주석 유약을 사용해 그림이나 문양을 그린 포르투갈의 특별한 도자기 타일이다. 본래 유약을 입혀 구운 진흙판을 의미하는데 아랍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준 여러 흔적 가운데 하나이다. 저렴한 재료인 진흙을 사용해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 등 지중해 연안으로 퍼졌다. 게다가 여름에는 더위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습기를 방지한다. 실용적인데 장식적이다. 평평한 작은 돌은 포르투갈 문화를 담은 예술과 전통으로 승화되었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 어느 도시에서든 쉽게 만날 수 있지만 특히 포르투의 첫인상은 아줄레주다. 리스본에서 포르투에 올 때 기차를 타고 포르투 캄파냐 Campanha역까지 온 다음 시내 중심에 있는 상 벤투 Sãn Bento역으로 가는 기차로 환승한다. 상 벤투 역에서는 아베이루 Aveiro, 브라가 Braga, 기마랑이스 Guimarães 등 근교 도시, 캄파냐 역에서는 리스본이나 코임브라 Coimbra 등 장거리 기차가 출발한다. 포르투 방문자 대부분은 상 벤투 역에서 포르투 시내에 처음 발을 디딘다. 상 벤투 역사로 나오면 두 개 층 높이 벽면을 통째로 캔버스 삼아 밝고 선명한 푸른색 아줄레주를 그려낸 예술 작품에 둘러싸인다. 기차역이 아니라 유명 미술관에 들어선 착각이 들 정도로 장엄하고 우아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가만히 서서 벽을 하나씩 곱씹으며 감상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커다란 아치 모양 창문 너머로 비치는 환한 햇살 덕분에 그림은 더욱 우아해 보인다.
포르투갈 역사는 잘 모르더라도 벽화 하나하나가 ‘포르투갈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구나’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정가운데에 말을 탄 왕이 등장하고 바로 옆에는 주교가 서 있다. 뒤로는 수많은 백성들이 줄지어 서있다. 또는 한 장군이 늠름하게 가운데 서있고 뒤로는 휘장이 새겨진 큰 깃발이 휘날린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는 그림도 있다. 어떤 벽화에서는 농부들이 추수를 하거나 고기를 잡거나 사람들이 다 같이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상 벤투 역 메인 홀을 장식한 2만여 개 아줄레주 작품은 당시 가장 유명한 아줄레주 화가였던 조르즈 콜라수 Jorge Colaço가 1905년부터 1916년까지 12년에 걸쳐서 만들었다.
포르투를 걷다 보면 꼭 한두 개씩 아줄레주 벽화로 장식한 성당을 우연히 지나치게 마련이다. 상 벤투 역을 나서면 오른쪽 삼거리에 천주교 성당 하나가 바로 눈에 띈다. 안토니오 도스 콘그레가두스 성당 Igreja de Santo António dos Congregados이다. 역시 벽면 일부가 안토니오 성인의 삶을 그려낸 푸른색 아줄레주로 꾸며져 있다. 상 벤투 역 뒤쪽으로 5분 거리에는 1709년 톨레도 대주교였던 알폰소를 기리고자 지은 산투 알폰소 성당 Igreja de Santo Ildefonso이 있다. 상 벤투 역 아줄레주를 제작한 조르즈 콜라수가 만들었다. 상 벤투 역을 기준으로 반대편인 서쪽 렐루 서점 근처에는 카르무 성당 Igreja do Carmo이 있다. 측면에는 카르멜 수도회 수사인 시몬 스톡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이야기가 대형 아줄레주로 표현되어 있다. 거대한 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자세히 보면 총 세 채로 구성되어 있다. 화려한 오른쪽 건물은 카르무 성당, 왼쪽이 카르멜리타스 성당 Igreja dos Carmelitas이다. 가운데 짙은 녹색 철문은 폭이 1m인 주택이다. 한때 카르무 수도사와 카르멜리타스 수녀를 구분 짓는 경계 역할을 했다. 볼량 시장 Mercado do Bolhão 근처에는 영혼의 예배당이라는 뜻을 가진 알마스 성당 Capela das Almas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아름다운 아줄레주로 덮여있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독서 모임 친구들에게 선물할 아줄레주 자석을 사려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개당 1~1.5유로 남짓이었고 4개에 5유로 이런 식으로 묶어서 판매했다. 디자인이 워낙 다양해서 어떤 패턴을 고를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겹치지 않도록 각기 다른 모양 10개 정도를 구매했다. 냉장고 자석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흔하고 저렴한 기념품이라 성의 없어 보이진 않을까 염려했다.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친구들을 만나서 타일 자석을 테이블에 쫙 깔아 두니 문양이 화려해서인지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비슷한 패턴 중에서도 친구들은 가장 자신의 취향에 어울리는 타일을 고르느라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친구들은 흡족해 보였다.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짧은 시간 포르투갈에 머물렀지만 포르투갈은 평소 생활에 소소한 즐거움이 깃든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이었다. 직업적으로 친절한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포르투갈인에게는 그 너머의 따스함과 배려심이 느껴졌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친절함과는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굳이 표현한다면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인 ‘정(情)’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밋밋한 채로 남겨졌을 돌에 색을 입히고 그림을 그려서 마을과 도시 곳곳을 아름답게 단장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멋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옛 포르투갈인들의 정신이 오늘날 그들에게 습관처럼 내면화된 것 같다. 내가 포르투갈인의 세심한 눈빛과 친절한 미소에서 느낀 아우라는 아마도 이 연장선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일상지인 빡빡하고 삭막한 서울로 다시 돌아와 살아가면서 포르투갈이 가끔 생각나는 모양이다. 유난히 포르투갈은 스스로가 미화라고 알면서도 머물렀던 아름다운 잔상이 갈수록 커져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