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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Feb 21. 2024

연민을 자극하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불안정한 인간관계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기나긴 이야기(4)

*이전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356




돌아보면 이렇게까지 개인 사정을 고백하며 양해를 구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요구를 관철하고자 한 것은 명백히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에게는 내 마음이나 사정 따위는 전혀 상관없고 오로지 원만한 서점 운영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에게 서점 방문자나 관련자는 서점에 이득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오로지 두 분류만이 존재했다. 사실 그는 줄곧 서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나의 선의에 매달렸는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일과 친분의 경계가 모호해져 우리는 사심 없는 사이라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말았다. 다시 똑같은 의자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개무시했을 때 가만히 듣고 있으며 혼란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말한 건 아예 기억을 못 하느냐. 이런 식이면 행사는커녕 앞으로 책방에도 오기는 힘들 것 같다’고 정색을 했어야 바람직했다.


하지만 바로 대응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너무 버겁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내가 늘 버겁고 힘들어 보이는 엄마에게 맞추고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처받고 힘들더라도 바로 옆에 나보다 더 안되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티를 낼 수 없다. 위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강해지기를 택하는 데 익숙해진다.


이처럼 타인의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도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야(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쩌겠니. 그쪽에서 나에게 꼭 해달라고 하는 걸(하지만 방법이 없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 어쩔 수 없잖아. 나에게 득이 되는 것도 별로 없는데 사정 사정하니까. 불쌍해서 이번 한 번만 그냥 해주기로 했어(내가 뭐 나 좋으라고 이러고 살고 있겠니.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애들 봐서 그리고 남편도 따지고 보면 불쌍하니까 그냥 맞춰주며 살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그러니까 나 좀 이해해 줘).’


자신이 선택을 하고도 마치 하기 싫어 죽겠는 일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듯이, 분명히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으니까(꼭 경제적 이득이 아니더라도) 선택을 했을 텐데 희생하고 있다는 듯, 자신이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을 피해자 위치에 두는 데도 익숙해서 지근거리에서 호소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약해지게 한다. 불쌍하게 보여 동정을 받는 전략으로 필요한 사람을 곁에 붙들어두는 것이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꾸며내지 않고 진심이라는 사실이 더 무서운 일이다. 사랑인 듯 포장한 유해한 관계를 깨닫지 못한 나는 엄마에게서 전 남편으로, 다시 책방 사장님으로, 그리고 한때 친밀했지만 지금은 관계를 정리한 친구에게로 곁에 두는 대상을 바꿔가며 착취받고 착취하는 관계를 기꺼이 반복해서 맺으며 인생을 그들에게 저당 잡힌 채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에게 일이 있어서 행사는 갈 수 없다고 문자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예 관계를 끊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때문에 다시 책방에 갔을 때, 의자 나르는 일이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권했다는 기상천외한 궤변에 프로그램이고 나발이고 이 사람에게서 당장 도망쳐야겠다는 경계경보가 울려 퍼졌다. 그는 난생처음 내가 먼저 손절한 사람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상담 선생님의 통찰로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자신이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존재로 여긴 것 같다는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는데 아마도 그는 행사에서 의자를 나르는 등의 일련의 활동이 내가 사회 경험을 쌓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 10년 차인 나에게 회사원일 때 받던 급여의 절반 남짓한 금액(사회초년생의 인턴 급여에 해당하는)으로 계약직 풀타임을 제시하며 내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순진한 뻔뻔함을 그제야 이해했다. 그도 처음부터 비상식적이고 비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겠지. 이상은 높고 꿈은 큰데 세상의 온갖 풍파를 맞으며 비틀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퇴화한 어른이 된 거겠지. 그럼에도, 조직생활을 10년을 한 사람에게 사회 경험을 쌓도록 하겠다는 무지몽매함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상이 또다시 가스라이팅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던 두 달 남짓한 경험의 주요 기록이다. 이 글은 현재의 시선에서 각 사건의 함의와 경과,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정리하며 덤덤하게 썼지만, 사실 당시에는 다시 착취당하는 관계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와 결혼생활 때처럼 호구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시는 나 자신을 갉아먹는 관계에 놓이지 않고자 매주 심리상담에 ‘매진’하고, 허구의 독립을 넘어 진짜로 독립한 사람이 되고자 나 자신을 성찰하는 동안 특히, 새로운 이성은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거의 유일한 외출이자 사람과 교류하는 공간이었던 안전하다고 여긴 동네책방에서 중년의 여성 사장님과 나도 모르게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간은 이다지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다.


절망적이었다. 고통스러웠다. 나아지고 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자신했는데 제자리걸음이었다. 경계를 한다고 했는데도 경계를 해야 할 사람과 엮이는 저주받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존하는 줄도 모르고 의존해 버리고 끌려 다니는 데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노력한다고 되는 일일까? 생각만큼 손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결코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지 않구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구나. 이런 시행착오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하는 걸까. 기약 없는 시간 앞에 무력했다. 맥이 풀렸고 좌절했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번에 악질 인연을 끊어낸 것,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이 분명했다.


모순적이게도 좌절 속에서 나는 어느새 진일보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해로운 인간관계를 용기 내서 정리한 경험으로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밀당은 필수이며, 맺고 끊는 주체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중요한 원리를 터득했다. 공감도가 높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내 감정에 좀 더 집중해 나의 욕구와 필요, 감정을 상대에게 적절히 전달하고, 상대에게 생각할 틈을 주어야 한다고 알게 되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마치 탁구를 치듯이 관계를 왔다갔다 시시각각 상황에 맞게 결정/조율하고, 고무줄을 늘였다 줄이듯 때때로 적정 거리를 유연하게 조절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친밀한 사이에서 관계 맺음이 서툴다고 인정하고 아기가 기고 서고 걷고 마침내 달리듯이 노하우를 하나씩 차근차근 체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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