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갱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였던 ‘병마용갱(兵馬俑坑)’.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병마용은 군사뿐만 아니라 전차, 말, 곡예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한 4개의 갱도 가운데 3곳에서 병사 8천여 점, 전차 130개, 말 520점이 있다고 추정하며,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상당수는 흙 속에 묻혀 있다.
막상 병마용을 직접 본다면 실제 사람과 너무 닮아서 섬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조각이 정교해서 놀랐다.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한 르네상스 시기의 그리스/로마 조각상과 제작 목적은 같지 않지만, 실제로 보니 그 규모와 섬세함에 감탄했다.
병마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키와 풍채, 얼굴 생김새, 특히 귀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 머리는 무스를 바른 듯이 올백으로 반듯하게 넘겨서 단정하게 묶고, 어려 보이지 않도록 콧수염을 정갈하게 길렀으며, 목에는 심지어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서 군기가 완벽하게 잡혔음을 알 수 있다.
장군은 병사보다 몸집과 손도 더 크고 좀 더 정교한 갑옷을 입었으며, 행정이나 보급을 담당하는 군사는 갑옷을 걸치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
원래는 채색이 돼 있었지만 대기와 접하면서 증발했는데, 손톱까지 색칠할 정도로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한편, 전시실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몇 개의 병마용을 잘 복원해서 유리관으로 전시해 보여주었는데,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이후로 예술품을 마치 유명 연예인의 팬이 된 듯이 관람한 건 처음이었다. 2000년 전에는 수많은 병마용 가운데 하나였을, 그러나 지금은 유리관에 영원히 박제된 유일한 병마용을 보고자 수많은 인파가 서로 밀치고, 사진을 찍느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북새통을 이뤘다.
자국이 강력했던 시절의 영광을 느끼고 싶은 중국인들의 강렬한 열망은 수많은 유적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병마용에서 가히 폭발하고 있었다.
병마용을 다 둘러본 소감은 의외로 ‘슬픔’이었다. 발굴을 하다 만 갱도의 뒤편에는 아직 이어 붙이지 않은 깨지고 망가진 병마용들이 마치 전쟁에서 죽고 다친 병사처럼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어떤 군사는 하반신이, 또 다른 군사는 목이나 두 팔이, 아니면 다리 한쪽이 없는 채로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갱의 앞에 군기가 바짝 들어 도열하고 있는 웅장하고 위엄 있는 군대는 ‘그러고 싶다’는 욕망의 투영이고, 실제 군사 대부분은 미완성의 병마용처럼 이름 없이 쓸쓸하게 잔인한 전쟁터에서 죽어가지 않았을까 싶어서 가슴 가득 밀려온 슬픈 감정에 압도되고 말았다. 말없이 고요한 눈물을 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를 죽은 뒤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건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사실 망상이지 않은가. 망상에 사로잡힌 강력한 독재자에게 무력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남긴 거대한 유적 덕분에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와 후손들의 경제적 이익에 기여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기분이 묘했다. 강력한 독재 권력 덕분에 중국 진나라 당시의 군사 복장, 군의 구성, 진법 등을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는 데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