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의 결혼이 아닌 결혼식과 신혼여행, 아파트가 목적은 아닌가
‘결혼’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순백의 웨딩드레스, 턱시도와 나비넥타이, 환하고 웃고 있는 행복한 신랑과 신부, 축하하는 하객들, 긴장되는 양가 상견례, 달콤한 신혼여행, 설레는 신혼생활……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 가운데 결혼의 본질보다 결혼식과 결혼준비 과정에 매몰되는 경우는 흔하다. 꼭 이 사람이라서 결혼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나도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싶은 무의식이 발동해서’ 결정하는 경우이다.
결혼 적령기이고 둘 다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데이트가 그럭저럭 재미있고,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고, 완벽하진 않지만 상대가 무난하고 평범한 게 결혼해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 싶어서 결혼을 결정한다. 두 사람 모두 경제적 여건을 갖췄는데 서로 성격도 무난하고, 대체로 부모님들은 장성한 자식이 결혼하기를 바라므로 양가 상견례를 무사히 마치면 결혼준비는 가속페달을 밟는다. 결혼준비 과정에서 사소한 의견 충돌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언젠가는 자신도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길 바라던 결혼이라는 이상적 목표 달성을 코앞에 두고 있으므로 최대한 양보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려고 한다. 같이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이나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은 생략하고, 주객이 전도돼 오로지 성공적인 ‘결혼식’과 결혼준비의 피로감을 날려 보낼 ‘신혼여행’을 목표로 내달리고는 한다.
사실 결혼의 성립 자체는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다. 구청(또는 시청)에 가서 신분증, 혼인신고서와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면 (정부 24 사이트 안내에 따르면) 3시간 내에 처리가 돼 공식적인 기혼자가 될 수 있다. 주의할 점이라면 증인 2인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와 서명, 양가 부모님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말하고 싶은 건 결혼이란 생각처럼 그렇게 거창하거나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서류를 제출하면 성립이 되는 무미건조한 법적절차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말하는 ‘결혼하고 싶다’라는 속뜻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 법적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고 믿고 지지하며, 서로 솔직하게 어떤 이야기든 주고받으며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힘든 일을 나눌 수 있고 기쁜 일은 함께 하며,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안정적인 한 사람이 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결혼준비는 회사의 프로젝트 하나를 완수하듯이 능력껏 진행을 하면서, 결혼에서 자신이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들을 정작 자신은 상대방에게 제대로 제공할 수 있는지 또는 상대방이 정말 그럴만한 역량을 갖췄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혼은 결혼생활에서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것,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누고 서로 제공할 수 있다, 제공을 못하더라도 감안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상세한 협의가 가능할 때 선택해야 한다. 이때가 바로 결혼 적령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매거진 <어바웃 러브>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는 어떤 사람인지 세세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과 상대의 구체적인 욕망과 한계(약점 또는 단점)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결혼을 보통 상대방의 장점을 바라보고 결정하는데, 결혼생활의 유지에서는 상대방의 약점 또는 단점을 자신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방의 단점을 참는다는 자세로는 부족하다. 참는다는 건 여전히 내 마음에 안 들지만 감내하고 견디겠다는 의미이므로 언젠가는 억압된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 단점조차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설 때 그때 결혼을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결혼이란 한 사람과 평생 배타적인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이고, 한번 성사되면 물리기가 쉽지 않다. 살다 보면 이혼을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결혼을 결정할 때 ‘언젠가 꼭 이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어느 때보다도 냉철하고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가령, 사소하게는 머리카락 때문에도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머리숱이 많고 머리카락이 긴 사람은 머리를 감거나 빗으면 수채통이나 바닥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곤 한다. 혼자 살 때도 머리카락을 제법 바로바로 청소하고, 룸메이트가 있으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청소에 더 신경을 쓰지만, 그렇다고 호텔이나 모델하우스처럼 바닥에 머리카락이 아예 안 보이도록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갓 결혼한 배우자가 청결에 엄격한 편이고 특히,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유난히 예민해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자의 성향에 맞춰서 나도 더 열심히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머리도 단발로 자른다. 나의 이런 노력을 알기에 배우자도 머리카락이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넘어가려고 노력한다. 배우자는 심지어 자신의 심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싶어서 전문가에게 심리 상담도 받아보지만, 도저히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나도 머리카락을 줍다 줍다 지쳐버렸고, 머리카락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배우자는 안쓰럽기만 하다. 상대방의 다른 면모는 다 좋은데도 치명적으로 머리카락만은 견딜 수 없는 것, 이것이 자신의 한계이다. 논의 끝에 두 사람은 별거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렸고, 이들에게 별거는 곧 이혼을 의미했다. 극단적인 가상의 사례를 가정했지만, 이처럼 두 사람 가운데 아무도 잘못하지 않아도 이혼에 이를 수 있다. 결혼과 이혼에서 사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특히, 결혼의 성사에서 사랑은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결혼도, 이혼도 해본 뒤에 운 좋게 친한 지인의 결혼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뒤늦게 결혼이란 어떤 과정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생각 없이, 성급하게 결혼을 선택했는지, 내가 바란 건 어쩌면 전 배우자가 아니라 결혼을 했다는 자체, 안정성,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의 존재, 더 넓고 쾌적한 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질문을 바꿔서 만일 결혼 당시에 내가 원룸이 아니라 아파트에 살고 있었더라도 그와 결혼을 했을까? 묻는다면, 그럼에도 그와의 결혼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답을 할 자신은 없다. 안정감과 나를 보호해 줄 존재도 환상이었다. 인생이라는 큰 틀 자체가 예측할 수 없고 불안정하므로 결혼을 했다고 결코 안정감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예측불가한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나를 보호할 존재는 바로 나 자신뿐이다. 타인에게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고 선택한 결혼은 결국,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의 결핍을 채우고 구원할 수 있는 존재 또한 바로 나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언제 해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은 지인의 일화는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