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부터 도망치기
치료가 오래되다 보면, 치료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치료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특히 병명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고 이렇다 할 정답 같은 치료가 없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기약 없는 긴 터널을, 보이지 않는 터널 끝 한 줄기 빛을 희망하면서 걸어가는 기분이랄까?
완치의 개념도 없기에 더더욱 그렇다. 사고로 여기저기 망가진 몸을 관리하며 삶을 살아나가야 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했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가야할 길이 먼데…’
나를 놓을 순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시작된 호흡곤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는 도시의 공기 자체를 숨 막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요양을 하기 위해 도망치듯이 내가 살던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서 숨을 제대로 쉬면서 호흡을 회복한 뒤, 단계별로 치료해 나가리라 다짐했다.
교통사고와 관련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가득한 도시여서였을까? 신체적 증상과 심리적 영향이 합쳐져서 할 수만 있거든 그 도시에서 벗어나 있고 싶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한 증상으로 교통사고 순간이 24시간동안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고, 달리는 차를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왔고, 차가 많이 있는 도로에 서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그 도시에 더 있다가는 정말 정신을 놓아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 이전부터 지인들로부터 들어온 얘기 중에, 어느 시골에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모인다는 대체의학을 하는 의원이 있었다기에, 그 곳으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내 20대의 계획은, 목숨 다해 노력해서 교육대학교 졸업장을 따는 것이 1차적 목표였다. 그것을 완수한 후 가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내 힘으로 다 갚는 것이 2차적 목표였다. 그러고 나서 시골 어딘가에 가서 모든 걸 다 포기한 채로 하루하루 연명하며 남은 생을 버티자 싶었었다.
그렇게 인생 계획을 짤 만큼 나는 사고 후 망가진 내 몸과 기약 없는 전투를 벌였었다. 그러다 결국 몸이 버텨내지 못 해 학업을 마치지 못한 거였고, 내 20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졸업장이 산산조각나면서 마치 20대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시를 더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 관련한 기억은 어느 장소를 가든 교통사고와 제적이라는 아픔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이 개인의 고통보다 단체의 입장을 더 편들고, 피해자인 나를 가해자 취급하고, 치료비를 요구하는 그런 존재로 오해하고 각종 거짓된 소문이 도는 것으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캐리어 하나를 들고 도시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