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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an 13. 2022

그 날,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

태어나 처음 맛보는 통증과 열

도대체 어떤 사고였길래 이렇게 다방면으로 후유증에 시달렸는지 많은 이들이 의아할 것이다.  때는 2009년 1월 말 그 날, 아직도 생생한 그 순간, 그 순간이 내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사고 당시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자체가 고통이어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 날의 그 장면을 풀어내보고자 한다.       


그 날 난 대구에서 고령으로 향하는 봉고차 안에 타고 있었다. 운전자는 같은 교회에 소속된 대학생이었고, 평소에 거칠게 운전하기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 미리 그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 차에 타지 않았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많이 해 보았지만, 그 때 나는 그 교회에 소속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그 형제가 평소 운전을 어떻게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 문화 속에서 자란 나는 그저 교회 사람이라고 하면 다 정이 가고 좋게만 보였기에 운전자의 운전습관이나 성향 등을 고려할 지혜가 없었다.      


대구에서 토요일 대학생 모임을 마치고, 식사 초대를 받아 고령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착시간에 늦어서 고령에서 재촉하는 전화가 운전자에게 왔다. 그 전화를 받은 후 운전자는 급하게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차가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오토바이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그 속도로 달리다보니 봉고차 전체가 덜컹거렸다. 그러다 과속방지턱에 차가 걸렸고, 그 순간 혼자 맨 뒷 자석에 앉아있던 내 몸이 붕 뜨면서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머리를 박자마자 쿵 하고 엉덩이를 좌석에 박아 내려앉았다. 


1분이라는 시간보다 더 짧은 것 같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몸 속 어딘가가 올바르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있다.     


그 날 이후 약 한 달여간 심한 몸살에 시달리며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온 몸이 1톤짜리 트럭 밑에 깔려있는 것 같은 압력에 시달려서 몸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내 몸보다 작은 밀실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거대한 압력이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강도의 통증도 나를 급습했다. 처음은 목, 어깨, 왼쪽 허리에서 설명 불가능한 이상한 통증이 시작되었고, 해가 거듭하면서 통증의 부위들이 전신으로 퍼지며 다양해졌다.  사고 직후 느낀 통증의 강도는 몸속에 톱니바퀴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 정도로 심했다. 타이레놀 몇 알 한 번에 먹어도 하나도 효과가 없었고, 통증의학과에서 가장 센 주사를 맞아도 통증이 줄지를 않았고, 류마티스내과에서 처방한 약 7알 이상을 한 번에 먹어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통증과 왼쪽 이상감각은 사라지지를 않았다. 


당시에 모 대학병원 류마티스 내과에서 의사가 섬유근육통증후군 진단을 위해 목, 어깨에 손을 닿았는데 의사의 손이 내 신체를 스치기만 해도 자지러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개월의 대학병원 진료 끝에 ‘섬유근육통증후군’ 진단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상증상들이 많았다. 특히 왼쪽과 오른쪽의 느낌이 다른 것은 내 몸이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24시간 내내 항상 느끼며 살도록 했다.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 중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마취제 성분의 진통제는 통증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지만, 1주일 만에 온 몸이 임산부처럼 부어오르는 등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다른 신경계통에 작용하는 독한 약들은 관절통이나 신경 이상감각에 전혀 효과를 보지 못 했다.


 그리고 사고 이후부터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열에 시달렸는데, 어떤 해는 장기가 타오르는 것 같은 열감에 9개월 넘게 시달린 적도 있었다. 생 삼겹살을 내 몸에 두면 익을 것 같은 정도의 강한 열이었다. 또한 사고 후 온 몸 근육 신경이 콕콕콕 바늘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신경통이 발생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 구석구석 번져갔다. 처음엔 너무나 괴로웠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신경통 또한 몸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자살하지 않고 그 몸을 살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선택이었다. 훗날 국제침구사 할아버지 치료로 몸 속 어혈과 고름들을 빼내고 신경통은 많이 극복했지만, 재활의 과정 중에 어떤 큰 자극을 받으면 신경통이 재발하고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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