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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운 식탁 Nov 15. 2019

이혼, 결심하다

♧. 이혼, 결심하다      




“당신은 도대체! 혼은 어디다 빼놓고, 빈껍데기만 지고 들어오니!”                




이혼 서류를 배낭 깊이 찔러 넣었다. 

‘남편은 어디 있을까, 그 여자와 뒹굴고 있을까?’ 

종일 남편에게 집착하는 자신을 위해서도 이혼은 정답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혼을 결심했냐고 남편이 물어 온다면 ‘당신이 원해서’라는 옹졸한 대답 외엔 달리 이유를 댈 수 없다는 부담감이 편두통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배낭을 열어 이혼 서류를 꺼내 펼쳤다. 

시퍼렇게 멍든 심장을 오려 붙인 것처럼 정 순정, 이름 석 자가 섬뜩하게 눈길에 와 닿았다. 

‘조금만 더 견뎌볼까?’ 

이름 위에 꾹 찍힌 붉은 도장밥을 어우르자, 좀 전까지 확고하게 다졌던 마음이 슬며시 우회하려 했다. 

흔들리는 마음이 못마땅해서 서류를 배낭 속 깊이 집어넣었다.      

 

남편은 이혼해 달라고 앵무새처럼 지껄이던 입을 꾹 닫고, 이혼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과 어정쩡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그녀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렸던 친정엄마가 돌아가시자, 가벼워진 그녀가 병든 시부모님까지 팽개치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까 봐, 갑작스럽게 납작 엎드려 복종의 태도를 보이는 위선적인 행동은 용서되지 않았다.          

 납빛 같은 남편의 얼굴이 불쑥 집안으로 들어섰다. 일찍 와 준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으나, 유독 파리하게 각질인 입술이 거슬려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머리 꼴이 그게 뭐야! 당신은 세월을 거꾸로 사니?” 

‘지금껏 그 여자랑 뒹굴었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밤톨 가시처럼 치켜세운 머리칼만 탓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라면 복종의 도를 넘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겠다는 남편의 태도는 예민한 신경을 더욱 긁었다. 

“당신은 도대체 혼은 어디다 빼놓고, 빈껍데기만 지고 들어오니!” 

 

그는 핀잔에 도가 텄는지 어두운 적막을 유영하는 달빛처럼 고요하게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끝내야지.’ 

긴 한숨이 토해졌다.     

 

 집을 나섰다. 

남편은 축 처진 어깨를 끌고 구부정하게 걷고 있었다. 오라를 받은 죄인같이 힘없는 걸음걸이에 부아가 치밀어 홱 돌아서서 짜증을 부렸다. 

“어깨뼈가 부러졌어? 오만 시름은 다 짊어진 천덕꾸러기 같잖아!”      

움칠 어깨를 세운 그는 그녀의 그림자에 발길을 묻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차라리 그 여자에게 갈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주면 간단하게 끝내 버릴 텐데, 외도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남편의 가증스러운 변명은 증오까지 불러일으켰다.          

 

무작정 떼어놓은 걸음을 멈출 수 없어 내처 걷다 보니,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철조망 울타리 쪽으로 다가섰다. 

“거긴… 출입금지 구역이야. 위험해.” 

남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디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우린 이미 위험지역에 들어섰는데, 이따위 위험 경고를 지킨다고 뭐가 달라지니!”     

 

 가시 철망을 넘기로 했다. 가까스로 울타리를 넘어 ‘수영금지’ 경고 팻말이 새겨진 위험지역에 들어섰다. 

가파른 언덕 아래에는 위험 경고문을 대변하듯, 깊고 짙푸른 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경사진 언덕 중턱에 그녀처럼 생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제법 넓은 지면이 편편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미리 준비해온 술을 꺼냈다. 

남편에게 술을 권했다. 단숨에 잔을 비운 남편은 스스로 비워진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남편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비어 있는 것을 못 견뎌냈다. 샤워기만 틀면 시원스레 물줄기가 쏟아져도 항상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 샤워를 했다. 식사 후에 남은 반찬은 식탁에 차려 두어야 밥을 먹은 것 같다며 식탁이 비어 있으면 화를 냈다. 

‘이 사람은 겨우 빈 것을 못 견뎌 여자를 만났을까? 단지 그뿐일까?’  

   

순정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강물이, 술잔이, 그녀가 빙글빙글 돌았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서 남편은 돌지 않았다. 모질게도 굳건히 앉아있었다. 

남편을 와락 끌어안고, 등골에 땀이 배도록 흔들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세상과 남편을 껴안고 있는 그녀였다.      

“흔들려! 당신도 흔들리라고!” 

흔들리지 않는 남편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남편의 중심은 옹골찼다. 

그녀는 웃었다. 깔깔깔. 흔들리지 않는 남편의 중심을 향해 돌진하며.     


“당신은… 부양의 책임자로서 손색이 없어. 온몸을 내 던져서 훌륭하게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 그 여자 덕분에 우리 가족은 잘살고 있잖아? 그렇지?”      

“…” 

“난 당신의 아내이길 바랐는데…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당신 아이들을 낳아준 사람? 집안일을 하는 사람? 시부모님 간병인?”      

이혼 결정을 내렸으면서 미련의 끈을 술술 풀어놓는 자신의 태도가 역겨웠다. 그래도 남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남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였는지.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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