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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운 식탁 Nov 15. 2019

풍요로운 식탁

풍요로운 식탁 

♧. 풍요로운 식탁      



남편을 찾아가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왜 남의 남편을 빼앗았냐고 항의하러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순정은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5호, 인터폰을 계속 눌렀다.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와 남편이 불륜관계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작 여자를 확인하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남편이 돌아갔다는 여자의 답변을 듣고, 순정은 돌아섰다. 폭풍을 뚫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게 달려왔던 길을 쉽게, 아주 쉽게, 한 치 망설임 없이. 그러나 들어오라는 여자의 당돌한 행동에 남편과 바람난 여자를 알고 싶었다.      

선뜻 집안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현관문을 꽝하고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핏물을 뚝뚝 흘리던 고깃덩이 냄새가 여자에게서 역겹게 풍겨왔다. 몸 안에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역겹다고 한꺼번에 아우성을 쳤다. 울컥, 속의 것이 넘어올 것 같아 호흡을 딱 멈추었다.      

멈췄던 숨을 거칠게 뿜어내고 한숨 돌리려는데, 여자의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식탁은 커다랗고 고급스러웠다. 

순정은 자신의 식탁을 떠 올렸다. 그녀의 식탁은 텅 비어 있었다. 초라하고, 싸늘하고, 가난하게 절박했다.  

펄펄 끓는 육개장을 올려놓아도 빠르게 식어갔고, 수저를 가지런하게 놓아도 수저 소리는 아득히 멀어졌다.      


여자의 식탁을 노려보았다. 여자의 식탁엔 대파 몇 조각을 남긴 빈 국그릇과 남편이 여자에게 쟁강쟁강 들려주었을 수저가 놓여있었다. 

여자의 식탁은 비어 있었지만, 가난하지 않았다. 여자의 식탁은 남긴 음식이 흐트러져 있어도 가지런했다. 여자의 식탁에서 금방이라도 수저 소리가 쟁강쟁강 들려올 것 같았다.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여자는 남편을 뺏긴 아내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순정이 쏟아내는 거친 숨쉬기를 즐기고 있었다.      


순정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는 여자와 남편의 체온이 남았을 것 같은 침대에 허물어졌다가,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빨간 법랑 냄비를 격렬하게 두드렸다가, 방향을 바꾸어 풍요로운 식탁을 조준하곤 했다. 여자의 풍요로운 식탁에서 남편의 수저 소리가 쟁강쟁강 들려왔다.      

남편의 수저 소리를 찾고 싶었다. 가난한 식탁에, 싸늘한 식탁에,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남편의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두고 싶었다.      


순정은 여자를 향해 돌아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내 남편을 사랑하나요?” 

피식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관계를 불륜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요. 우린 공동 사업자예요.”     

순정은 자신이 몹시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남편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질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럼 잘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남편을 찾아가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왜 남의 남편을 빼앗았냐고 항의하러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순정은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을 돌려 달라고, 목청 높이 소리치지 못하는 심정은 비참했다.

여자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고 말았다. 진주를 꿰던 바늘 끝이 심장에 무수히 꽂히는 느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또박또박 걸어 복도로 향했다. 여자가 간곡히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걸, 윤재 씨가 몰랐으면 해요. 우린… 아직은 헤어지지 못해요. 아직은… 우린….”      

또다시 꺾이려는 무릎에 불끈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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