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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Sep 01. 2023

우리의 보편 1

  자정이 지나 보숭은 은영에게 전화를 해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음식이 너무 많아. 킹스턴에서 그들은 자주 음식에 대해 말했지만 은영은 그런 식은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처치 곤란의 것들이 아니라 한국은 지금쯤 뭐가 철이겠다는 식으로 어떤 허기를 음식으로 치환시켜 향기롭게 말했다. 타국의 향수병에 걸린 늙은이들처럼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은 그랬다. 하지만 막상 만나서는 국적을 알 수 없는 프랜차이즈 음식을 먹기 일쑤였다. 봄 주꾸미, 여름 향어, 가을 전어, 겨울 빙어, 봄 도다리, 겨울 무나 봄 미나리처럼 여리고 향기로운 물 냄새가 나는 것들을 어디에 가면 먹을 수 있는지 그들은 잘 몰랐다. 그들은 몰라서 말만 했다. 다음에는 꼭 제철 음식을 먹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래서 은영은 장례식장에서 보숭과 함께 밥을 먹는다면 그게 처음일 것 같았다. 제철은 아니지만 제대로 장소에 맞는 음식, 누군가 죽으면 함께 먹는 음식. 무가 흐물하게 익은 빨갛고 뜨거운 소고기뭇국, 뭉근하게 삶은 시래기 된장국, 장례식장에서 먹으면 살 것 같은 음식, 사는 동안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걸 먹으면 모두가 보편의 죽음으로 흘러갈 것 같은 음식들. 은영은 알겠다고, 가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까지도 은영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학교에 있었다. 은영은 방과 후 영어 교사였다. 연달아 네 타임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은영은 학교 옥상의 CCTV가 없는 사각지대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지난해 새로 리모델링한 학교는 기존의 인조 잔디를 제거하고 진짜 잔디를 깔았다. 덕분에 여름 방학이 두 달이 됐고 겨울 방학은 사라졌다. 학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봄에 개학을 하고 매립형 스프링클러가 아이들이 하교하는 오후에 물을 뿌렸다. 은영은 낮은 허공과 물보라 사이에 만들어진 무지개를 봤다. 모든 경계가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흐릿했다. 은영은 무지개의 일곱 색깔을 한 번도 다 찾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네 가지에서 세 가지 정도의 색이 다였다. 어렸을 때는 왜 그런 것들을 기를 쓰고 찾으려고 했는지 몰랐다. 스프링클러가 멈추자 물기를 머금은 운동장 위에 반원을 그리던 무지개는 금세 사라졌다. 그걸 보자 은영은 어쩌면 사라지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지개처럼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들에는 왠지 조바심이 일었다. 

  얼마나 걸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은영은 뒤늦게 보숭의 문자를 확인했다. 은영은 거의 다, 다 왔어, 라고 거짓말을 했다.      

  늦은 저녁 장례식장에 도착한 은영은 헤맸다. 장례식장은 종합병원 지하에 있었는데 입구가 달라서 은영은 음료 자판기와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휴게공간을 지나 주차장 쪽으로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날이 추워 상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한쪽 손이 모두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모두 그렇게 있으니까 웃겼다. 그럴 때, 하하하 웃어야 하는지 호호호 웃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보숭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다 곤란해진다고 말했다. 은영은 보숭과 달랐다. 은영은 지하 장례식장 안에서 방향을 몰라 곤란했다. 보숭이 누나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걸자 보숭은 특유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특1호라고 했다. 특실이라는 뜻일까? 1호는 뭐지? 은영은 그게 중국집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쓰는 말 같았다. 

  장례식장 공용 로비는 중국집보다 회전 교차로에 가까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자 도망치는 바퀴벌레들처럼 보였다. 로비 중앙에는 조의금 봉투와 붓펜이 놓인 테이블 그리고 천장에서 내려온 안내 모니터가 있었다. 모니터는 삼성 파브였고 UHD로 화질이 유난히 선명했다. 화면에는 상주와 미망인, 자, 손들의 이름과 입관 날짜, 시간, 발인, 장지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나왔다. 이름만 바뀐 비슷비슷해 보이는 정보들이 차례로 떴고 보숭이 누나 차례가 되자 비교적 짧은 가족 관계가 떴을 뿐이었다.

  자도 손도 없는 보숭이 누나의 아래쪽 빈칸에는 세 송이의 국화 사진이 떴다. 은영은 그게 이상했다. 사람들이 꽃을 표현할 때 싱싱하고 아름답다고 한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국화는 그랬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보숭이 누나가 살아 내야 했지만 살지 못한 여백을 그렇게 처리한 모양이었다. 은영은 여백이 이번 생에서 보숭이 누나의 마지막 정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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