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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Sep 01. 2023

우리의 보편 3

  어떤 날을 그런 식으로 기억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보숭이 누나가 죽기 전인 지난달. 은영은 고인 물에 낀 이끼를 보며 청계천을 걸었다. 물가에 그림자를 드리운 버드나무가 앙상해서 바람에 쉽게 흔들렸다. 물에서는 심한 비린내가 났다. 그날 은영은 보숭을 만나 익선동의 돈카츠 집에서 둘이서 네 가지 메뉴를 주문해서 맥주를 마셨다. 다 먹고는 천천히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 글판을 봤다. 보숭과 은영은 만나면 주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는데 일차와 이차 중간에 갈 수 있으면 교보생명 빌딩에 들러 문장을 읽었다. 그건 일종의 코스였는데 둘 다 차가 없었기에 만나면 자주 걸었고 우연히 한번 지나친 것이 자주 그렇게 된 거였다. 일반적으로 본사 사옥에는 기업을 대표하는 슬로건이나 광고가 붙었는데 광화문 글판은 삼십 년 넘게 문장을 걸었다. 그 사실을 은영은 조기 유학에서 돌아온 해에 알게 됐다. 

  문장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그날은 아주 크고 짧은 문장이 어두운 하늘에 걸려 있었다. 보숭은 참 좋다고 했다. 어떻게 좋아? 라고 은영이 묻자 일부러 음정을 띄워서 차, 갑, 게, 따, 뜻, 해, 라고 했다. 그게 뭐야? 그렇게 말했지만, 끝과 끝 같은 다른 말이었으나 은영은 이상하게 알 것 같았다. 은영은 문장이 어두운 하늘에서 빛처럼 내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좋은 말이 많고 그걸 문장으로 쓰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약간 술에 취해 은영이 말하자 지나가는 말처럼 보숭이 네가 한번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내가?”

  은영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한 일기조차도 초등학교 이후로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보숭은 그러니까 이제부터 써 보라고 했다. 

  “해 봐.”

  일기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며 누가 아냐고 했다. 보숭이 네 문장이 미래에 저기 걸리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 라고 기분 좋게 말했다. 검은색 패딩 점퍼 위에 다시 회색 패딩 조끼를 입은 보숭을 보며 은영은 보숭의 말이 순서를 모르는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운영은 미래의 문장을 머리 위에 두고 걸었다. 바람이 찼고, 발이 몹시 찼지만 은영은 이상하게 마음이 안 찼다. 너무 많이 먹어 이제는 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배를 두드리며 둘은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겨 또 연근 튀김을 아주 많이 먹고 헤어졌다.      

  복도의 근조 화환은 모두 벌을 서는 사람들 같았다. 벌을 서면서도 웃고 떠드는 사람들처럼 국화는 모두 싱싱하고 꽃잎은 풍성했다. 삶의 바깥으로 영원히 쫓겨난 줄도 모르는, 어쩌면 보숭이 누나 같았다. 하지만 그게 모두 보숭이 누나의 화환이 아니라는 것을 은영은 특1호에 닿기도 전에 알았다. 특1호는 오른쪽에서 또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장례식장이었는데 화환은 한참 앞에서 끊어졌다. 복도 중간에 화환의 주인인 듯한 장례식장은 특2호였고 신발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신발들이 마치 좁은 입구를 서로 몸을 밀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처럼 엉겨서 쌓여 있었다. 은영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 반면 보숭이 누나의 빈소는 입구부터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무덤의 입구 같았다.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외진 곳, 응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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