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기로 밭을 갈아버린 날

경이로움과 막막함 사이에서

by 산다

봄이 완전히 지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텃밭으로 나갔다.


한동안

밭은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잡초가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고

흙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잡초를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밭을 다시 정리하고

굳어버린 흙을 뒤집었다.

땅이 너무 딱딱해서

결국 관리기를 사서 갈아버렸다.


처음 귀촌했을 때의 나는

흙을 갈지 않는 텃밭을 꿈꿨다.

자연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는

생태 텃밭 같은 것.


그런데 그때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편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모종을 심고

다시 씨앗을 뿌렸다.


며칠 뒤

흙이 아주 조금 갈라지더니

작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씨앗 하나가

땅속에서 싹이 되고


싹이 자라

줄기가 되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다시 씨앗이 맺힌다.


그 씨앗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또 다른 생명을 시작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압도적으로 경이로웠다.


나는 그 작은 싹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흐름을

처음으로 제대로 본 사람처럼.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순환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그동안 나는

아이 없이 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 결심을 한 지도

벌써 8년이 지나 있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나에게 맞는 삶이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텃밭에서 씨앗을 바라보다가


나는 처음으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선택이 아주 거창한

결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방향을 잃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적성을 찾는 일도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그 막막함 속에서


엄마가 되는 삶을

선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회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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