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십여 년 전 한 포럼 사무실 행사에서 일을 했다. 어느 토요일, 대전에서 행사가 있었다. (등산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날따라 관광 버스에 타기 싫었다. J 팀장 개인 차에 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정책연구원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내가 그럴 수 있나. 나는 대전에 가서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던 중년의 남녀 참석자들이 술에 취해서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벌칙은 이성의 볼에 뽀뽀하기였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결혼을 한 상태였고, 대학 교수, 대학 강사, 연구원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니 구경하면서 밥을 먹었다.
취지를 알 수 없는 행사가 끝이 났고 버스는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술에 취한 K대 L교수가 강압적인 말투로 주변에 앉아 있는 여자들에게 질척거렸다. 아까 뽀뽀의 여운이 계속 되는 것 같았다. 실장은 여자들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간식을 권했다. (당연히 실장이 시켜서 한 일이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내 자리에 여성 해양 연구원이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L교수 때문에 자리를 이동한 것 같은데 끈질긴 L교수도 여성 해양 연구원 대각선 뒷자리에 따라와 앉은 모양이었다. 나는 L교수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빈자리가 거기뿐이라 선택할 수도 없었다. L교수는 여성 해양 연구원이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자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런데 방심한 사이 일이 벌어졌다. L교수는 나에게 “안그래, 정 간사?” 라고 동의를 구하면서 손바닥으로 내 왼쪽 가슴을 두 번 쳤다. 순간 당황해서 멈칫했지만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실장은 나와 L교수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는지 나를 다른 자리로 보냈다.
나는 지금 이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L교수와 같은 족속들이다, 성추행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를 몰아세울 수 있으니 실장과 먼저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해서도, 주말이 지날 때까지 실장은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섭섭했다. 정황상 실장은 분명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는 월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무실에 가자마자 실장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나는 K대학교 L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실장은 알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나는 독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못 넘어가겠는데요.” 실장은 나를 귀찮아했다. “뭘 원하는데?” 이 씨버럴놈아. 뭘 원하겠어, 사과지. 돈 달라고 하면 돈 줄 거야? 교수 때려 치라고 하면 때려 칠 거고? 실장은 L교수한테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 자리를 차지했던 그 여성 해양 연구원이 나를 찾아 왔다. “정 간사, 우리 포럼 대표님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가요.” 어라? 우리 포럼 대표님은 내 존재조차 모르는데. 우리 포럼 대표님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줬다고 성추행을 그냥 넘어가야 하는 거지? 대부분 나에 대한 접근이 틀렸다. 나는 가장 먼저 괜찮냐는 위로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K대 L교수한테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사무실에 슬금슬금 퍼졌다.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상임이사 얼굴에 물을 끼얹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상임이사는 갑자기 대화의 화제를 술자리에서 여자가 해야 하는 조신한 대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딸은 말이야. 회식을 하다가 옆에 술 취한 남자 직원이 추근대면 많이 취하셨네요, 조심하셔야겠어요, 하고 똑 부러지게 행동을 한 대. 그러니 성추행 따위를 당할 리가 없지.” 상임이사는 항상 나에게 첫째 딸과 동갑이라면서 자신을 아버지라 생각하고 했던 인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장이 나를 불렀다. “K교수가 이유 없이 너한테 그냥 사과한댄다.”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유 없이요?” 당황한 실장이 말을 더듬었다. “아, 어. 술 취해서 기억은 안나지만 사과를 원하니까 사과를 한 대. 대신 마포에서 L교수 만나고 와. 여의도에서 만나면 자칫 이야기 나올 수 있으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랑 L교수 단 둘이 만나라니. 나는 L교수가 돌변해서 증거라도 있어? 증거 내놔, 하면서 나를 공격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를 위해 증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니 말이다.
나는 마포에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그리고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K대 L교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 간사 오래 기다렸어? 뭐 마실래?” 나는 “아무거나요.” 라거 대답했다. 얼마 후 직원이 생강차 두 잔을 가지고 왔다. L교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간사, 내가 그날 술에 취해서 말이야. 집에 가자 잠이 들었는데 실장한테 연락이 와 있는 거야.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 사실 기억은 안나. 그래도 정간사한테 그랬다면 무조건 사과를 해야지.” 나는 화를 꾹꾹 누르며 이야기했다.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시잖아요. 더 조심하셨어야죠. ” L교수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지금 기러기 아빠거든. 부인이랑 자식들이 유학을 가 있어. 아, 내 첫째 딸하고 정간사가 동갑이더라고.” 나는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당신 첫재 딸은 소중하고 다른 사람 막내딸은 가슴을 쳐도 된다? L교수는 아무래도 내가 이 일을 공론화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정 간사가 원하는 대로 내가 다 할 게. 정말 미안해. 포럼을 나가라고 하면 나가고.”
나도 고민이 많았다. 대학원 지도 교수의 소개를 받고 들어간 사무실이었다. 게다가 L교수는 포럼 대표의 부탁을 받고 포럼과 연을 맺은 것이었다.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인 결론을 내렸다. 아, 어쩔 수 없었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교수님, 학생들한테 절대 신체 접촉하지 마세요. 술 핑계는 절대 안 통합니다. 포럼은 그냥 계시고요.” L교수는 나한테 약속했다. “정간사 말대로 할 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마지막으로 사무실로 돌아 왔다. L교수와 대화가 녹음된 휴대폰을 챙겨서 말이다.
L교수는 사무실에 올 때마다 꼭 나한테 인사를 하고 갔다. “정간사, 별일 없어?” 나는 L교수의 얼굴을 보기 무척 불편했다. 하지만 L교수는 오히려 나와 친해졌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미친놈. 결국 나는 성추행을 당하고서도 위로를 받기는커녕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받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딸 같다고, 우리는 가족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 욕한다. ‘지랄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