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손과 발에서 땀이 많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피아노 학원에서 레슨을 받으면 선생님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건반을 닦을 정도 였다. 긴장을 하면 땀의 양이 늘었다. 그런데 가족과 밥을 먹는 편안한 환경에서도 손에서 땀이 났다.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들면 땀이 팔뚝으로 흐를 만큼.
나는 친구들과 손을 절대 잡지 않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악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상대방 몰래 계속 바지에 손바닥을 닦았다.
중학생이 되고 스타킹을 신으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시큼한 발 냄새. 교칙 상 구두를 신을 수밖에 없었는데 최악의 환경이었다. 매일 구두를 햇볕에 말리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로 발이 축축했나면 실내화를 신지 않고 복도를 걸으면 내 발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손이 습해서 습진을 항상 달고 살았다. 봄이 되면 손가락 끝 마디가 쩍쩍 갈라졌다. 겨울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면 김이 났다.
다한증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무척 심했다. 대학생이 되고 시험을 보는데 감독을 하던 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학생, 괜찮아요?" 갱지가 땀으로 젖는 걸 본 모양이었다.
친구들은 여름에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으라고 권했다. 맨발로 길을 다니면 온갖 먼지가 다 달라 붙어서 더럽기 짝이 없었다. 성스럽지 못한 나의 시커먼 발. 하, 내 속도 모르고!
시골 집에 내려 가자 엄마가 신문 기사를 보여줬다. 대전 E 대학 병원에서 다한증 수술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으며 부작용도 거의 없다는 내용이었다. 입원 시기도 무척 짧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한증 수술을 막 시작한 초기였는데 너무 성급했다.)
나는 E 대학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가 손발에서 나던 땀이 엉덩이와 무릎에서 소량 날 수 있다고 했다.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요. 나는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다. 상의를 탈의하고 누워 있는데 남자 인턴 의사 세 명이 수술실로 들어 왔다. 나와 나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 했다. 아무래도 참관하러 온 것 같았는데 너무 민망했다.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데 꽤 열이 받는 일이다. 환자의 동의도 없이, 환자에게 설명도 없이. 환자는 부끄러움이 없는 줄 아냐, SBR !
나는 수술이 끝나고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었다. 폐에서 공기를 빼고 폐 뒤 교감 신경을 절단했다. 수술 부위는 작았지만 전신 마취가 필요한, 생각보다 복잡한 수술이었다. 수술 후 몇 시간 동안 가슴 통증으로 힘들었다. 나는 손발이 건조할테니 크림을 듬뿍 바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마냥 기쁘기는 개뿔. (수술 후 외래 진료 때 의사가 만족도를 점수로 말해 보라고 해서 97점을 줬는데... 이상한 질문 같다.)
다한증 수술 1년도 채 되지 않아 손발에 땀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 왼손은 땀이 나지 않는다. 발은 예전보다 땀 양이 늘었다. 문제는 보상성 다한증까지 생겨서 상반신에서 땀이 났다. 티셔츠를 입으면 브래지어를 찬 부분을 제외하고 앞뒤가 흥건히 젖었다. 걷기만 해도 땀이 주루룩 흘러 화장지로 닦아낼 정도였다. 속옷은 항상 축축했다. 계절 상관 없이. 겨울에도 패딩 안쪽에 습기가 찰 정도이다. 나는 의사에게 분노했다. 다한증 수술 부작용을 자세히 설명해줬다면 결코 다한증 수술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누군가 다한증 수술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무조건 반대했다. 물론 개인 차가 있겠지만 이 놈의 땀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정상 같았다.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다 오고 나서 기겁을 했다. 남색 원피스 오른쪽 겨드랑이부터 오른쪽 날개뼈 부근까지 하얀 소금기가 얼룩져 있었다. 나는 너무 창피했다.
다한증 수술 신경 재건술을 고려해 봤지만 성공율이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대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받아들일 때도 된 것 같은데 이 성스럽지 못한 땀은 나를 너무 괴롭힌다.
뭐, 다한증 수술 이후 한 가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선택적 의료 행위는 광고성 신문 기사에 혹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여차저차한 겸손한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