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집안일을 -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등등 – 잘하지 못합니다. 결혼 초부터 교사였고, 첫애가 태어나면서 살림은 장모님이 다 해 주셨으니 해 볼 기회도 없었지요. 장모님이 연로하시고 건강도 좋지 않으셔 지난해에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사용할 그릇이 없어야 설거지를 하고,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어야 빨래를 하며, 손님이 온다든지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시에만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좀 더 무던하지 못한 성격을 가진 내가 참지 못하고 일을 하곤 합니다.
어느 날도 예전처럼 편치 않은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내가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일을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내를 향하여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일이 반드시 아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화가 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나는 그 일을 하기가 싫었고 하기 싫은 일을 아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게으름을 숨기고 아내의 의무 소홀로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설거지 하는 것에 대해 고맙다 생각을 하지 말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그런 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나는 그동안 해 오던 일을 정리하면서 시간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내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집안일도 예전보다 많이 하게 되었죠. 그래도 여전히 남자에게 집안일은 그리 편치 않았고, 특히 밖에 일이 없는 남자가 집에서 살림을 한다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살림을 꼭 여자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일은 내가 아내보다 더 잘하고, 또 내가 시간도 자유로운데. 나는 그 날로 아내에게 선언을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살림은 내가 한다. 지금부터 살림은 나의 일이다." 라고.
나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합니다. 아내는 옆에서 조간신문을 뒤적입니다. 나는 설거지를 합니다. 아내는 TV 드라마를 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안경을 찾아 달라 합니다. 나는 빨래를 갭니다. 아내는 화장을 지웁니다. 우리 부부의 자연스러운 풍경입니다. 아내는 이제 반찬 투정도 합니다. 매일 같은 것만 해 주어 먹기가 질리다고. 그런 아내가 좀 얄밉기는 하지만 그렇게 밉지는 않습니다. 아내에 대한 나의 이런 편안한 태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철이 지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버린 느낌입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고 자유도 있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냄새가 납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그리곤 곧 냉장고 청소가 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내 몸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위의 글은 살림을 내가 하겠다고 선언하고 난 그해 2006년에 쓴 글입니다.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여전히 살림을 내 일로 하고 있으며 아내는 바깥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주변에 가까운 분들은 매우 흥미로워합니다. 여러 가지를 궁금해합니다.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바꿈으로써 남자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는지, 부모님은 그렇게 사는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으며 또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남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본인에게 매우 힘든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편이 하게 되는 집안일 중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다 놓는 일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웃 사람을 만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좀 시간이 흐르면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옆집 아주머니와 인사도 나누게 됩니다. 빨래를 널면서 담장 넘어 보이는 이웃에 반가워하며 일상적인 안부도 묻습니다. 그렇게 고상한 척하던 체면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친구 부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일상적입니다. 친구 부인과는 공통의 화제가 많습니다. 훨씬 진지하고 재미있습니다. 친구를 제외한 우리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떱니다. 씁쓰레한 표정의 친구 얼굴과 왠지 살짝 부러워하는 친구 부인의 표정을 읽곤 합니다. 많은 남성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입니다. 남편 잘 만난 줄 아시라고.
만약 13년 전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지금에서 보면 나에겐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많은 경험을 하였고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항상 한구석에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아내의 어깨에 가정경제라는 큰 짐을 얹혀놓았습니다. 내일의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아내를 보곤 했습니다. 그 당시 아내가 써 놓았던 글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나의 자유는 아내의 고통을 대가로 얻었나 봅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잘 만난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