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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 Oct 26. 2022

시나리오를 짜고 오는 환자

어째서 그들의 시나리오는 비슷한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 좁은 나라에도 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을.

일반인들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사람들.

치과에도 마찬가지이다. 별의별 환자들이 다 있고 그들은 내 상상을 뛰어넘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소위 일반적이지 않고 치과에 해를 끼치려고 의도하는 사람을 가리켜 '시나리오 짜고 오는 환자'라고 지칭한다.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들의 시나리오는 아주 신박할 때도 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선배 치과의사들이 겪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그 시나리오를 미리 보고 나도 대응을 해나가는 편이다.

아마 내가 선배 치과의사들의 경험담 없이 바로 이런 일들을 겪었다면 반드시 멘붕이 왔을 것이다.

우선 그들은 치과 치료를 받기까지는 별다른 시나리오를 펼치지 않는다.

시나리오의 시작은 수납을 해야 할 때부터이다.

치과에서는 대부분 진료 전에 오늘 받을 진료에 대한 진료비를 미리 얘기해 주는 편이다.(비급여 진료일 경우) 따라서 치료에 동의를 한다는 것은 진료비에 대한 동의도 포함되는 것이다. 옷을 사거나 음식을 먹을 때도 우리는 그것들을 사기로 결정하거나 먹기로 결정할 때 가격을 미리 살펴본다. 그리고 옷을 사거나 음식을 먹는다.

옷을 다 입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갑자기 말을 바꿔 이렇게 비싼지 몰랐다. 돈이 없다. 이러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은 이런 치료를 받으실 것이고 진료비는 얼마입니다. 오늘 얼마를 수납해 주셔야 합니다."

"네~"

이러고 치료에 들어간다. 치료가 끝나고 수납을 얘기하면 그들은,

"오늘 돈을 안 가져와서 다음에 드릴게요."(시나리오의 시작)


이들의 특징은 미안하거나 죄송해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진료 전에

"오늘은 돈을 안 가져와서 다음에 진료받을게요."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돈이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진료를 받고 나가면서도 당당하게 돈이 없다고 표현한다.

다행히 치과 진료는 한 번에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치과 데스크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다음에 오실 때 수납 먼저 해주시고 다음 진료 이어서 진행해 드릴게요."

"네~"

이때까지도 이들은 순한 양이다.

 

드디어 다음 진료 예약 시간. 접수를 받는 데스크 직원이 말한다.

"지난번에 수납해 주시기로 한 얼마 수납 먼저 해주세요."

"오늘도 진료비가 나올 건데 나중에 한꺼번에 수납할게요."(두 번째 시나리오)


"지난번에 오늘 진료하기 전에 진료비 수납 먼저 해주시기로 해서요."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깟 얼마 내가 돈 안 낼 줄 알고 이러는 거예요? 환자를 믿어야지. 기분 나쁘게 하네."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기서 물러서서 그 환자의 지난 진료비를 받지 않고 환자의 요구대로 진료를 먼저 해준다면 그 환자는 오늘 진료 이후 연락 두절이 될 확률이 99.9%이다.

그 환자의 시나리오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사실 그 사람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이미 두 번이나 벗어났다.

첫 번째는 진료 전에 진료비에 대해 설명 들었음에도 그날 돈 없이 치료받고 간 것.

두 번째는 다음 진료 전에 미수금 수납이 이루어져야 함에 동의했음에도 오히려 적반하장 화를 내고 있는 것.


우리 데스크 직원이 환자로부터 폭언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면 내가 데스크로 출동한다. 그리고 돈 얘기를 한다.

"수납해 주세요."


환자는 구시렁대며 수납을 한다. 물론 나에게도 화를 내며 수납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국 수납은 하는 편이다. 

자자. 이게 끝이 아니다. 

아직 시나리오는 진행 중이다.

어떻게 겨우겨우 진료가 완료되면 여러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자기가 수납한 돈을 돌려받으려는 시나리오를 펼친다.

첫 번째는 엉뚱한 치아를 치료했으나 책임져라.

두 번째는 치료한 이가 아프니 치료를 잘못했으므로 책임지고 환불해라.

세 번째는 다른 치과보다 비싸게 치료했으니 환불해라. 등등이다.

보통 이렇게 시나리오가 진행되면 결말은 거의 비슷하다. 치과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 나는 엉뚱한 치아도 아니고 잘못된 치료도 아니며 다른 치과보다 비싼 것은 환불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준다. 그러면 반말, 쌍욕, 멱살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에 경찰을 부르게 된다.


이때 좀 당당하게 나가야지 돈 얼마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나 싶어서 환자에게 져주면 계속 끌려다니게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뭐 네 번째 다섯 번째도 있을 수 있다. 결제를 다른 카드로 다시 하겠다 하면서 카드 결제 취소를 원한다. 이때 카드 취소를 먼저 해주면 다시 결재하겠다는 다른 카드는 잔액이 없거나 사용이 안 되는 카드이다. 그리고 그 환자는 그 이후 연락두절 99.9%. 

따라서 반드시 새로운 카드 결제를 먼저 하고 결제 취소를 해야 한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고 생각해보면 다 돈 때문이다.

환자는 돈 때문이 아니라 치과에서 자신을 기분 나쁘게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치과는 기분 좋으라고 오는 곳이 아니라 치료를 받으러 오는 곳임을 그들도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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