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열두 살 형아가 된 첫째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오늘로 일주일 차.
하루가 열흘 같고, 일주일이 영원 같다. 4개월 이상 아이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각자의 삶의 중심을 누리다가 오래간만에 우리가 한 곳에 모여 24시간을 살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매사에 기준이 높은 나와 느긋함의 정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삶의 잣대가 관대한 아이가 만나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으러 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밥을 먹는 태도와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는 시간까지 어느 것 하나 내 눈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입이라도 무거워서 열리지 않으면 그나마 나하나 속 쓰리고 말겠지만, 눈에 걸리는 대로 입이 자동으로 열려버리니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래라저래라 저래라 이래라 입을 대기 시작하면 못할 말 빼고는 다 쏟아버리는 바람에 마음으로는 내가 분명 피해자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이 앞의 부끄러운 가해자가 되고 만다.
오늘 아침에도 한바탕 강풍이 불고 지나갔다. 이틀쯤은 평온하고 또 다른 날은 억압과 잔소리의 칼날이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다. 말하는 내쪽에서도 듣는 아이 쪽에서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참을 걸 후회해 보지만 이미 서로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해있다. 그럼에도 다행이며 감사한 것은 서로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우리 사이의 차가웠던 기운은 다시 따스하게 녹아내려 서로가 사과할 건 사과하고 괜찮은 기분으로 하루를 이어가곤 한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 그리고 둘에서 셋이 되면서 육아의 강도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게다가 지금은 잠시간의 주말부부까지 병행하고 있다 보니 '맨 정신'일 때가 많지 않은 셈이다. 어렵고 힘들다는 말을 쏟아내고 싶은 날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얼굴과 크고 작은 등짝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부정의 감정이 쑥 하고 들어간다. 이렇게 아이들을 셋이나 낳고 살아간다는 건 결국은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사랑해서 벌인 일이다. 작고 귀여운 꼬마에서부터 점점 자기주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는 듬직한 첫째 아들까지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아이가 없기에 꾸역 꾸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서라도 이렇게 살아내는 것이다.
건강하고 멋지게 잘 키워주고 싶은 마음과 사랑이 많은 아이들로 키워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태운 열차는 이미 칙칙폭폭 속도를 내기 시작하며 달리고 있다. 장애물을 만나 가다 말고 멈춰 서기도 하고, 옆 기차와 비교를 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고 하루이틀 재정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연료를 채우면 삼둥이 기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끄럽게 철길을 달린다.
세 아이를 키우는 본질은 결국 사랑이라는 두 글자다. 사랑이 있기에 견디며 키워내며 사랑이 있기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그 사랑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세 아이를 세상 속에 건강하고 단단하게 세우기까지는 아직 오랜 시간이 남아 있고 어쩌면 더 험난한 시간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본질을 잘 붙잡고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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