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공문도 생각해보니 글쓰기였어
글쓰기가 좋았고, 글을 잘 쓴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20년 동안 무늬만 조금 달라졌지 글을 쓰는 홍보와 대외업무 관련된 일을 해왔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데 글과 멀어지는 일을 하는 현재의 나는 내내 지금 하는 일이 내 적성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살고 있다.
아직도 내 머릿속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고, 여전히 괜찮다 안 괜찮다를 반복하고 있다.
누구 말처럼 직장을 다니면서 적성을 찾는 것은 배부른 투정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의 영역을 정하는 것은 인사발령문에 적힌 부서가 아닌 오로지 내 몫일 것이다.
낯선 일도 3년여 가까운 시간의 힘이 보태지니 여유가 생기고 마음도 고쳐 먹게 되었다. 내가 회사 안에서 회사 입장을 쓰는 홍보 관련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글과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지사들의 월별 수입을 관리하는 이 부서도 알고 보니 글을 쓸 일이 많았다. 공문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전국에 있는 직원들에게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새롭게 도입한 제도에 대해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낯설고 어려울 것을 감안해 협력 부서에 내 문장의 오류가 없는지 의견도 묻고 상대적으로 근무기간이 짧은 직원에게도 쉽게 읽히는지 피드백을 받았다. 그러다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슬쩍 지나쳤거나 간과된 부분을 조금 다듬으면 훨씬 매끄러워지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글은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내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효과적으로 바로잡아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영상 숏츠니 요약본에 익숙한 우리는 어느새 상당히 복잡하고 긴 문장에 취약해졌다. 전해야 할 내용이 많다면 보기 좋게 편집하려 애쓴다. 문장으로 쭉 연결하기보다는 번호를 달아서 체크리스트를 보듯 구분해서 내용전달을 하려 했고, 표를 만들어 신속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기에 한 눈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중요한 내용은 글자색을 달리하거나 진하게 표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밑줄을 긋는다. 신문기사도 중요 부분은 진하게 글자체를 바꾸어 서비스하는 시대인 걸 감안하면 굵기를 다르게 하는 것은 일종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공문을 쓰다 보면 짧은 문장이지만 은근히 꼬여있는 문장을 푸는 일이 만만치 않다. 가끔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말이 안 되지 싶을 때도 있다. 소유의 의미를 담은 '의'자가 중복되기도 하고, 정중한 표현인 '바랍니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수도 많다. 문장의 길이도 길지 않게 쓰려한다. 법률적인 인용의 문장은 불가피하게 길이가 길어지더라도 온전히 들어가게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각주로 처리하거나 별도로 표기하여 중요한 핵심 메시지로 내용을 먼저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문장이 길어지면 주어와 마지막 서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꼭 주어와 마지막 서술어만 따로 떼어서 말이 되는지 한 번씩 더 점검한다.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지. 공문을 쓰는 일에도 퇴고의 힘은 유효하다는 걸 실감한다.
글은 나와 멀리 있지 않았다. 에세이를 쓰지 않아도 시와 소설을 쓰지 않아도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글과 단절된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몰랐지만 알고 보면 글을 쓰면서 나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글과 함께한 주중의 회사생활을 보내고 주말이면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내 마음이 스며드는 문장에 밑줄을 치면 된다. 더 좋은 것은 내 생각을 적어두면 책의 내용이 선명히 아로새겨질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일주일에 2번 연재하는 브런치의 초안을 잡는 글을 쓰는 것이다. 당장 어딘가에서 투고 제의가 오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를 믿고 꾸준히 해내면 뭐가 돼도 될 것이다. 당장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마음을 다시 세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