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가진 한계를 실감했다.
출산 후 처음으로 강의를 하고 왔다. 6시간 넘게 서있어서 일찍 잠들고 싶었던 날이다.
수유하고 저녁 잠 재우고,
아기가 잠든 사이에 후다닥 저녁을 먹었다.
토끼잠을 자고 일어난 아기를 남편이 씻기고 나서
마무리를 내가 하고 다시 수유하고 재웠다.
거실로 나오니까 우리 집 개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안 나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개를 데리고 부랴부랴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 배변패드 갈고, 이번에는 밥 달라고 쳐다보길래 밥을 챙겨줬다.
숨 좀 돌릴까 했는데 저녁에 나온 젖병들이 눈에 띈다.
시계를 봤다. 해야 할 일만 겨우 했다. 어느새 11시였다.
'젖병까지는 어렵지.' 잠깐 앉아 있다가 저녁 먹었던 그릇을 씻으려고 일어났다.
남편에게 시선이 갔다. 아까는 유튜브를 보더니 지금은 게임을 한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어떤 체력으로 하루를 보냈을지, 지금 컨디션은 어떨지 생각 안 할까?
한편으로는 부모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면 다르게 행동했겠지 싶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콕 집어 말하라고, 강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수십 번을 말해도 모를 땐 어떻게 한담?
"밥 좀 챙겨줘."
"짧게 돌리고 와줘."
"배변패드 좀 갈아주라."
"식세기 좀 돌려줄래."
"세탁기에서 세탁물 좀 꺼내다 놔주라."
왜 늘 내가 먼저 말해야 하나. 한두 번 말하면, 세 번째 정도는 알아서 하면 안 되는 걸까.
1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그 말은 집안 살림이 돌아가는 모습을 무려 10년이나 지켜봤다는 의미이다.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우리는 같이 육아하고 살림하는 모습이 될까? 생각이 많아진다.
입력해 놓고 알아서 하면 그게 로봇이지, 사람인가 싶다가도 나도 사람인지라 힘들다.
말하는 일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특히, 부탁이나 요청은 더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날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야속할 뿐이다.
다음날 남편에게 장문의 톡을 보냈다.
어제는 피곤하고 서글프기까지 했어.
지금 컨디션은 괜찮아. 후련해.
글 쓰면서 계속 정리를 했거든.
긴 이야기를 기어이 말하는 이유는
털어놓지 않으면 쌓인 것들이 떠오를까 봐.
그래서 말하는 거야.
고맙게도 틈틈이 표현해 주고 격려해 주지만
때로는 함께하기도 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가 있어.
나도 사람인지라.
잠시 후 남편이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표현력 하나는 기똥차다.
구구절절한 사과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난다.
뜬금없지만 아이는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설에 굴하지 않고 강의를 하러 다녔을 때 뱃속에 있었으니.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한 말 아냐."라고 말했다.
사실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앞으로도 육아와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아니 그것들을 놓고 남편을 바라보며 서운하고 억울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굳이 표현하는 이유는 난 이렇게 느꼈다고 상대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개운하기 때문이다. 그 표현을 받아주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말에는 한계가 있다.
- 내뱉는 즉시 사라진다.
- 에너지가 필요하다.
- 반복될수록 힘을 잃는다.
말이 어려울 때면 글이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