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 이혜림 Mar 29. 2024

시댁의 미니멀 라이프

시어머님을 미니멀 살림으로 이끄는 방법에 대하여 


"내가 나이를 먹고 이렇게 보니까 말이야. 이제 집을 조금씩 정리하면서 살아야 돼. 아니, 진짜야.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들이 뒷정리하는 거, 그것도 다 일이더라고. 내가 평소에 딱 쓸 것만 가지고 살고 이제 안 쓰는 거 쟁이는 건 그만해야겠어."


모든 일은 어머님의 그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는 묵은 살림을 싹 비우고 자주 쓰는 물건만 가지고 간소하게 살고 싶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미니멀 라이프로 책까지 쓴 추진력 강한 며느리가 놓칠 리 없었다. 당장 다음 날 함께 어머님의 살림을 비워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커피 한 잔으로 카페인 충전을 바짝 했다. 그러고는 어머님, 남편과 함께 손을 걷어붙이고 마치 당장이라도 이사 갈 것처럼 집을 거덜 내며 비우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집을 정리하는 목적이 아주 분명했다. 


첫째, 안 쓰고 보관만 해둔 묵은 살림을 청산하고

둘째, 물건으로 가득한 방을 정리해서 부부의 휴식 공간을 마련하고 

셋째, 좌식 생활을 입식 생활로 바꾸고 싶다. 

 

목적이 명확하니 할 일도 명확해지고, 그만큼 집 비우기가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오전에 시작한 집 정리는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쉴틈 없이 물건을 꺼내고 선별하고, 비우는 행위를 반복하느라 정신이 없어 끼니 챙기는 것도 잊어버렸다.그만큼 온 가족이 물건을 비우는 데 한마음 한뜻으로 진심이었고,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집의 완전한 환골탈태. 가전, 가구와 쓰레기 봉투가 끊임없이 나오는 광경을 보고 옆집에서는 이사라도 가는 거냐고 물었다. 




어머님의 옷장 맨 아래 서랍에는 30년 묵은 새 수건들이 가득했다. 어느 체육대회, 어느 돌잔치에서 받은 수건 선물인지 날짜와 함께 꼬리표처럼 낙인찍혀 있는 새 수건들 사이에서 어머님은 수건 몇 장을 건져 올렸다.


"이건 우리 엄마가 나 시집간다고 선물로 사주신 수건들인데 그게 이렇게 여태껏 써보지도 못하고 묵혀 있었네."


시집 가서 곱게 예쁘게 잘 살라고 친정어머니가 사주신 수건이 아까워서 차마 쓰지 못한 채 수십 년간 보관만 해온 어머님의 마음을 나는 알 것도 같다. 그러나 한 번도 쓰지 않은 고운 색의 새 수건들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서랍 구석에서 30년이라는 세월에 다 삭아버려 너무도 볼품없어졌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30년 세월에 삭아버린 수건을 보고 큰 결심을 한 어머님은 어무 오래 써서 낡고 거칠어진 헌 수건들을 몽땅 쓰레기 봉투에 버렸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새 수건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고운 것들만 골라서 욕실 수납장을 채웠다. 수건을 비운 것을 시작으로 어머님의 비움에 가속도가 붙었다. 옷장과 서랍에 차곡차곡 각 잡아 예쁘게 보관되어 있던 옷들도 몽땅 꺼내어 바닥에 펼쳐 보이고서 가장 잘 입는 옷들을 제외하고는 싹 비웠다. 그동안 옷장에 옷이 너무 많아서 평소에 자주 입는 옷들은 밖에 설치한 행거에 걸어두었는데, 안 입는 옷들을 싹 정리하고 나니 옷장에 옷이 다 들어가고도 넉넉하게 남았다.


낡고 녹슨 옷걸이도 몽땅 버렸고, 언젠가 손님이 오면 쓸지도 모른다며 수십 년간 보관해온 무거운 이불과 베개도 모두 정리했다. 붙박이장에 공간이 생기면서 여기저기 집안 곳곳에 분산되어 있던 여분의 생필품과 식재료를 싹 모아서 정리했다. 더는 필요 없는 가전과 가구는 폐기물 배출 딱지를 붙여 내놓았다.


각종 담금주와 과일청도 싹 비웠다. 담금주와 과일청이 비워진 유리 수납장 선반의 묵은 때를 걸레로 힘주어 닦아내면서 내 마음도 다 시원해졌다. 그렇게 10시간이 넘는 고강도의 집 정리로 어머님의 숙원 사업을 마쳤다. 비운 자리에는 어머님이 원하셨던 입식 생활을 위한 새 식탁과 소파를 채웠다. 


그 날 이후로도 어머님의 비우기는 계속됐다. 옷장도 버리고 선반도 버리고 그렇게 생긴 빈 공간에는 건조기를 들여 놓았다. 건조기는 몇 년 전부터 어머님이 갖고 싶어했던 가전제품이었는데, 그동안 집에 건조기를 넣을 공간이 없어서 사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제 오래 써서 낡은 건 다 버리련다. 그동안 아끼느라 안 쓰던 거 꺼내 쓰면서 내가 나를 대접해주면서 살려고." 


수화기 너머 부드러운 어머님의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머님의 변화는 이제 내게는 너무 당연해서 의식조차 못했던 미니멀 라이프의 힘을 다시금 깨우치게 해주었다. 


더는 사용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며 내 마음의 짐으로 남은 물건들을 비우는 것,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공간을 내 마음에 들도록 내 생활 패턴에 맞도록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 그런 과정을 통해 나를 좀 더 알아가는 것. 스스로를 아끼고 공간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내가 나를 대접해주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 그게 미니멀 라이프였다.


어머님에겐 다음 계획도 있다. 너무 커서 베란다에 두고 쓰는 800리터 훌쩍 넘는 거대한 냉장고가 고장이 나는 날이 오면, 미련 없이 버리고 작은 냉장고를 들일 생각이라고. 터다란 냉장고가 빠진 자리는 빈 공간으로 둘 거라고. "햇살이 가장 예쁘게 들어오는 곳이니까 아침마다 여기서 차 마시면 좋겠지."라며 웃으셨다. 


'비우기' 이전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어머님은 시골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저장해두고 먹어야 하는 것들이 많아 커다란 냉장고는 필수라고 말하곤 했따. 그런데 어느새 어머님도 작은 냉장고를 꿈꾼다. 매실 장아찌나 젓갈처럼, 평소 자주 먹지도 않는 거 철마다 만들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만들던 수많은 저장 음식들도 더는 만들지 않을 거라고, 지겹다고. 


미니멀이 이렇게나 무섭다. 모든 것이 간결하게 정리되고 나면 내게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이 머릿속에 명확하게 나열이 되면서 삶의 궤도 자체가 완전하게 변해버린다. 나는 어머님께 물건을 비우고 나니 어떤 점이 가장 좋은지 여쭸다. 어머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셨다.


"내 마음이 제일 좋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기분이 좋고, 집이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갈 필요도 없고, 이쪽 서랍을 열고 저쪽 서랍을 열어도 꼭 필요한 물건만 있어서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다. 얼마 전에는 내가 40년 된 묵은 사진들도 싹 비웠잖니? 딱 몇 장만 남겨두고 싹 비웠어. 정말로 다 버렸어." 





옷장 서랍장 붙박이장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몽땅 꺼내 놓았다 




예쁘게 개어져 있던 옷들도 예외 없다. 모두 꺼내서 내가 가진 물건의 총량을 눈으로 확인하기 




모든 가구 안을 비우고 깨끗하게 걸레로 닦아 낸다. 신중하게 선별한 물건들을 들여놓을 준비 중. 





비워지는 것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같은 목적의 살림들을 한곳에 몰아 정리해주기 




수많은 담금주와 청들도 싹 비우기. 그동안 의무감에 만들어왔던 것들... 




비워지는 과정들 



깔끔하게 정리된 붙박이장 


물건들이 주인이었던 방이 드디어 시부모님의 단정한 휴식 공간이 되었다. 





* 더 많은 이야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 05화 다리 꼬고 태어난 당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