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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Mar 27. 2024

다리 꼬고 태어난 당근


지난 초봄, 지나가는 길에 엿본 모종 가게 가판대에 쪼르르 올라가 있는 당근 모종이 너무 귀여워서 사버렸다. 


상추 모종 심은 밭 아래쪽 조금 비어있는 공간에 흙을 파고 당근을 심었다. ‘작고 여린 흙뿌리에 불과한 이 모종이 크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그 당근이 된다는 거지?’ 텃밭 농사가 처음인 우리 부부에게는 모든 작물과의 첫 만남은 늘 신기하고 재밌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다. 이 잡초같은 게 그렇게까지 큰다고?


바람이 불 때면 연두빛의 여리여리한 잎파리를 휘날리는 모습이 예뻤던 당근 모종은 봄 내내 무럭무럭 자라서 한 달 여만에 푸르른 숲처럼 풍성해졌다. 언제 수확해야 할까 당근 모종과 눈치 싸움을 하다가 농장 사장님께 수확 팁을 들었다. 지면 위로 솟아오른 주황색이 시중 마트에서 사 먹는 당근의 굵기와 엇비슷해졌다 싶을 때, 그때 당근의 고운 머리채를 잡고 쑤욱 뽑으면 된다고.


완연한 봄이 지나고 땅 위로 빼꼼 올라온 당근이 얼추 굵어졌다. 첫 당근 수확을 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내가 직접 수확한 당근으로 홈메이드 당근 케이크를 구워주겠노라고 남편에게 큰소리도 땅땅 쳤다. 봄 내내 상추만 수확해서 먹다가 처음으로 구근 작물을 먹는 기대에 부풀어 남편도 옆에서 기대하는 얼굴로 뽑혀져 나오는 당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뽑혀져 나온 당근은 평소 내가 보던 당근과 다른 모양이었다. 곱게 쭉 뻗은 모양 대신 꼬불 꼬불 다리 꼬고 태어난 당근. 이상하다 싶어서 그 옆의 당근, 그 옆옆의 당근, 그 옆옆옆의 당근도 뽑아보았는데 하나같이 모두 다리를 꼬고 있다. 




나란히 줄 지어 세워 놓으니 사람이 다리 꼬고 누워 있는 모양새다. 그 모습이 퍽 웃겨서 남편과 배꼽 잡고 웃었다. 시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어 초짜들의 엉터리 농사에서 오는 즐거움을 공유했다.


뿌리 채소는 직파해서 키워야 한다는 조언을, 당근 모종을 심고 나서야 들었다. 뿌리 채소는 뿌리가 곧고 크게 자라면 그걸 수확해서 먹는 건데, 모종 같은 경우는 농사가 미숙하거나 흙 상태에 따라 제대로 곧게 뻗어 자라지 않고 꼬부라지면서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리 당근 모종이 귀여워도 구입하진 않았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 꽈배기처럼 다리를 꼬고 태어난 당근을 보자 왜 직파해서 키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다.



제일 작은 크기의 당근을 골라서 탁탁 흙 털고 수돗가로 가 깨끗이 씻었다. 아그작 하고 한입 베어 무니 코끝과 입안에 달달하고 진한 당근 향이 퍼진다. 노지 밭에서 바로 수확해서 먹는 것들은 강인하다. 마트에서 사 먹는 곱게 자란 것들과는 다르게 향이 진하고 더 아삭하다. 모양은 웃겨도 직접 키워서 먹은 당근은 아주 달고 맛있었다. 




다음 날에는 꼬불거리는 당근을 깨끗하게 세척하고 깍둑깍둑 잘라서 카레로 만들어 먹었다. 카레를 먹고도 남은 당근은 잘게 다져서 홈메이드 당근 케이크를 구웠다. 카레로 먹을 땐 카레 향에 묻혀서 못 느꼈는데, 케이크로 구워 먹으니까 그동안 마트에서 산 당근으로 만든 케이크와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구울 때부터 이미 당근 고유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텃밭에서 키워진 당근이 우리 집 식탁으로 오기까지 여러 유통 과정을 거쳐야 할텐데, 직접 키워서 먹으면 그 과정 자체가 몽땅 생략되니 더 신선하고 싱싱할 수밖에. 





열심히 구운 당근 케이크 한 판이 단 10분 만에 비워졌다. 초봄에 모종을 사다가 심고, 물 주고, 잡초 뽑아가며 키워 수확하고. 집에 가져와 흙 털고 손질하고. 시간과 공을 들여 갈아서 반죽을 하고, 오븐에 굽고. 먹는 것은 10분이면 끝나는 케이크지만 직접 재배부터 굽기까지는 몇 개월이 걸렸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예스!


텃밭에서 키워서 먹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더는 자연과 음식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텃밭에 사는 작은 벌레 한 마리 조차도 말이다. 내 앞에 놓여있는 한 그릇의 음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온 만물이 합심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마지막 남은 꼬부랑 당근들을 모두 수확한 어느 초여름. 남편과 나는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당근은 무조건 씨로 직파해서 키우자고.



당근 씨앗 
풍성한 당근 밭 
솎아준 아기당근은 샐러드에 넣어 먹으면 맛있어요 
더는 다리 꼰 당근을 만들지 않습니다 :) 





* 더 많은 이야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737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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