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에 좋아요
한의대 6년 과정은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나뉘는데요.
본과에서 본격적으로 경혈학*이나 침구학*을 배우기 전에, 예과 때는 한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과목을 공부합니다. 아무래도 동의보감 같은 옛 서적을 공부해야 하다 보니, 천자문이나 논어, 중용 같은 과목을 배우기도 하고요. 화학, 생물 같은 과학 과목도 공부하죠.
이러한 기초 과목은 꼭 필요하지만, 조금은 지루하고 흥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기도 해요. 얼른 침을 직접 놔보고 싶고 약을 지어 먹어보고 싶은 욕심이 자꾸 생기는데요. 그래서인지 예과 때 선배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몇몇 혈자리에 대한 효능이 그렇게 재미있고, 기억에도 오래 남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태계입니다. 이 혈자리는 일단 그 위치를 찾기 쉽고,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예과 때부터 알게 된 혈자리인데요. '불면증에는 태계 혈을 쓰면 된다'는 태계 혈자리의 효능이 잊히지 않습니다.
머리에 있는 혈자리로 그 이름부터 '안면(安眠; 편안히 잠을 잔다)'인 혈도 있는데, 왜 태계를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했을까요?
그 바탕에는 태계가 신장 경락의 혈자리라는 기본이 깔려 있는데요.
태계는 신장 경락에 속한 27개의 경혈 중에서도 원혈(原穴)입니다.
원혈이란 각 장부의 원기(原氣)*가 머무르는 혈자리로, 해당 경맥의 병을 치료하는데 대표적인 혈자리예요. 즉 태계는 신장의 기운과 힘이 모여있는, 신장 경락에서 가장 중요한 혈이라고 할 수 있어요.
'큰 계곡'이란 이름 '태계(太谿)'도, 신장 경맥의 기운이 모여 큰 물이 되었다는 뜻에서 불여졌지요.
한의학에서 신장은 단순히 비뇨계인 콩팥을 뜻하지 않아요,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는데요.
오행* 중에서 신장은 물에, 심장은 불에 속합니다. 물이 적으면 불이 치성해지는데, 우리 몸에서 불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열이 나고 염증이 생기게 돼요. 이로 인한 증상은 두통, 이명(귀울림), 입이 건조하고 마르는 것, 인후통, 치통, 객혈(기침을 할 때 피가 나오는 것) 등이 있고요.
태계 혈을 지압하면, 부족한 물을 보충해주어 화를 내려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심장의 화가 타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그득하거나, 심하면 가슴의 통증을 느낄 때도 도움이 되죠.
또한 신장은 뼈 그리고 골수, 뇌수와 관련이 깊은데요.*
신장의 기운이 튼튼해지면 뇌로의 순환이 좋아져, 뇌가 건강해지고 마음이 안정되며 지혜롭게 됩니다. 그래서 건망증에도 좋고, 잠을 못 자는 증상에도 도움이 되죠.
스트레스를 받아 화가 나고 머리가 복잡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깊이 잘 수가 없어요. 이럴 때 열이 나는 머리와 가슴을 식혀주는 태계 혈은 좋은 수면제가 될 수 있겠죠? 잠을 자기 전에 과격한 운동을 하면 오히려 몸이 흥분 상태가 되어 깊은 잠을 자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면 숙면에 도움이 되는데요. 특히 너무 피곤하고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날이라면, 간단하게 태계 혈을 몇 번 지압해주고 자는 것도 좋습니다. 태계 혈만 누르는 것이 별로 자극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반대편의 곤륜혈과 같이 잡고 눌러주는 것도 괜찮아요.
태계 혈은 안쪽 복사뼈와 아킬레스건 사이의 오목한 곳에 있습니다. 곤륜 혈은 바깥쪽 복사뼈와 아킬레스건 사이에 있죠. 곤륜 혈은 방광 경락에 속하는데, 신장은 오장 중에서 물과 관계된 장(臟)이고 방광은 육부 중에서 역시 물과 관계가 깊은 부(腑)로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곤륜은 태계 혈과 함께 지압하기에 편한 위치뿐 아니라, 효능 면에서도 서로 돕는 좋은 짝꿍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귀찮다면 압봉을 태계 혈에 붙이는 것도 괜찮아요. 압봉이 없다면 파스를 작게 잘라 태계 혈에 붙이고 잠자리에 들어보세요.
건조한 우리 몸을 적셔주는 태계 혈이, 꿀잠을 자는데 보탬이 되어줄 거예요.
* 경혈학 : 14경맥(6장6부 12경맥+임맥+독맥)에 속해있는 혈자리에 대한 학문
* 침구학 : 한의 치료의 주요 수단이 되는 침, 뜸 등에 대한 학문
* 원기(原氣) :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데 근본이 되는 기
* 오행 : 목(나무), 화(불), 토(흙), 금(쇠, 금속), 수(물)
* 오장 중에서 간은 근육, 심장은 혈맥(血脈; 혈관, 경맥), 비장은 기육(살), 폐는 피부, 신장은 뼈 골수와 각각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