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경 시인의 ‘농담 한 송이’
오늘 아침 식탁엔 지난주 시누이가 보낸 딸기와 동서가 보낸 사과가 밋밋할 뻔한 양상추샐러드를 맛깔나게 했다. 생일선물로 받은 과일들이 어찌나 싱싱하고 실한지 냉장고를 열 때마다 추수철 농부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어제는 남편이, 오늘은 내가 시를 읽는다. 요즘처럼 뉴스 보기가 두려운 세상에 시 한 편의 쓸모는 얼마일까. 그래도 아침 식탁에서 시 읽기는 멈추지 않으려 한다. 시가 아니라면 가난한 가슴과 조촐한 식탁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 수 없어서다. 때때로 모르는 것투성이인 채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낙관이 차오르기도 한다.
농담 한 송이
허 수 경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겨우 6줄의 시가 시든 배추 같던 마음에 비를 뿌린다. 우리 안 곳곳엔 슬픔과 아픔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무성한 그것들 사이사이에 돋아난 농담 송이를 시인은 찾아낸다. 서러운 곳에서도 농담 한 송이를 따서 가져오려는 시인의 마음이 스르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사라져도 좋을 만큼 잘 살아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시를 읽다 보니 슬그머니 쓰고 싶어져 때때로 오지 않는 영감과 줄다리기를 한다. 시를 읽고, 또 시를 쓰려고 용을 쓰기도 하면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나를 만든다. 그래서 시를 짓는 건 자주 휘청이는 나를 단단하게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 뒤늦은 생일선물이 도착했다. 생일 당일에 받은 선물 쿠폰에 주소를 입력했는데 나흘 만에야 예쁘게 포장된 립스틱이 왔다. 며칠 잊고 있다가 받은 선물 때문인지, 예쁜 짓만 골라 하는 조카 녀석 때문인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모’ 발음이 잘 안 돼 “이오, 이오”하며 나를 따르던 아이가 어느새 예비역 공대생이 됐다. 여동생과 내 등 뒤에서 누가 엄마인지 헷갈려 내 허벅지를 붙잡고 “엄마”라고 하던 아이였다. 세월이 유독 내게 야박한 건 아닌가 싶지만,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면 그저 모든 게 감사할 뿐이다.
젊은 날에는 인생의 길섶 어딘가에 뭔가 대단한 것이 숨겨져 있을 줄 알았다. 마치 소풍날 보물 찾기에 나선 아이 같은 마음으로 걸어오는 동안 환희의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야 뭔가 좀 알 듯한 나이가 됐다. 행운을 바라는 건 욕심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일이다. 퇴직 후 현저히 떨어진 기억력으로 시 한 편 제대로 외우지 못해도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봄날이다. 마음을 달리 먹으니 감사한 일들이 줄지어 이미 내게 와 있다. 오늘 당도한 행복도 보는 눈이 없으면 흘려보내기 쉽다. 시와 음악이 흐르고 꽃과 과일이 놓인 소박한 아침 식탁에 봄기운 머금은 햇살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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