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무거운 너를 비웠더니 새로운 걸 채울 자리가 보이더라. '버리다'가 아닌 '비우다'. 그리고 다시 '채우다'.
인간을 여러 갈래로 나눠 만들어진 수만 가지 집합체들 중 난 '집합 정리에 재능이 없는'에 속한다. 정리가 가진 의미 중 '버리다'에 특히 취약하다.
얼마 전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이사를 앞둔 샤이니 키의 일상이 나왔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감정 물건'이란 말이 나왔는데 엄마가 주신 선물인 책과 친구가 준 모빌 등 지금 당장 읽고 쓰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순 없는 물건들을 '감정 물건'이라고 말했다.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는데 '감정 물건'이란 말에 박수를 치며 공감을 했다(예쁜 쓰레기란 말을 가끔 썼는데 감정 물건이란 말을 듣자마자 맘에 쏙 들었다). 사실 물건에다가 그때그때의 감정을 담기 때문에 난 정리를 못 한다기보단 '안' 한다고 말하는 게 더 맞다(고 말하고 싶다).
집에 이런저런 물건들이 많은 이유다. 직접 산 물건, 친구들이 준 선물 그리고 여기저기서 데려온 것들. 좋은 곳을 여행했을 땐 기념품을 사고 맛있는 음식점에선 또 그걸 기념해서 하다못해 음식점의 이름이 새겨진 냅킨을 챙겨 오기도 하고 공연 전시 티켓 등등. 이건 글씨체가 너무 예뻐서 챙기고 저건 컬러 조합이 맘에 들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때의 추억과 나 그리고 우리들의 감정이 담겨 있는데 그걸 어떻게 내다 버린다는 거야... 남들이 보기엔 쓰레기일지 몰라도 내겐 이렇게 소중한데.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챙기고 모으는 이유는 생각보다 너무나 많단 말이다. 천차만별의 인간 부류 중 난 '그런 류'에 속한다.
그런데... 내가 선물을 대하는 방식을 본 주변인들의 평은 가끔(?) 갈릴 때도 있다. 선물은 물론이거니와 그 선물을 감쌌던 포장지까지도 모은다는 점에서 말이다. '직접 고름'이란 보이지 않는 게 보이는(?) 포장지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땐 어쩔 수 없다.
포장지를 벗겨낼 때 내 손은 섬세의 절정에 다다른다. 시작부터 난관 봉착이다. 곳곳에 붙어있는 진득한 테이프 혹은 스티커들. 손톱의 적당한 기울기와 손끝의 힘으로 포장지를 밀어 눌러가며 붙어있는 스티커나 테이프를 떼어낸다. 눈매는 점점 가늘어지고 가늘어진 만큼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다. 숨을 참느라 야무지게 다물은 입술 안 쪽, 위아래 이들도 서로를 밀어내느라 난리도 아니다.
이 대단한(?) 작업 안에 제일가는 복병은 '스티커'다. 여러 면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내 입에서 '너무 귀여워', 내지 '예쁘다.....'라며 속마음이 살짝 벌렁 거렸다면 아... 또 어쩔 수 없다. 이 스티커까지 살려야 하는 나름의 명분이 생긴 것이다.
포장지도 챙겨 스티커도 살려 리본도 너무 예쁘니까 말아놔야지. 선물을 건네준 사람들의 마음과 기쁜 내 감정을 가득 담아 이것들을 한데 모아둔다. 가끔 그들에게 다시 선물을 줄 때 그때의 리본을 묶어 보낼 때도 있다. 암튼.... 편지를 모아두는 마음과 비슷하다. 눈에 보이는 글자가 없을 뿐이지 모든 게 편지 같아서 한 번씩 꺼내어 그때의 감정들을 곱씹는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난,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내 몸보다 큰 소파를 버리기로 맘먹었다. 큰맘 먹고 모아놓은 포장지들을 또는 여럿 중 가끔 쓰는 그릇 하나를 정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파는 아마 감정 물건들 중에서도 메가급이지 않았을까.
두 자릿수를 막 앞둔 그만큼의 해 동안 내가 앉고 눕고 그 위에서 꽤 많이 잠을 청했던 그래서 잠자며 꿈꿨던 소파다(생각해 보니 정말 소파에서 많이 잤구나). 커피도 차도 맥주도 마시고 주전부리도 먹으면서 영화도 책도 보고. 양쪽 끝에 나이테와 옹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꽤나 넓은 나무 팔걸이가 붙어 있고 그레이와 베이지 정중앙에 위치한 그런 색의 옷을 입은 예쁜 소파.
꽤 오랜 시간 몸을 맞대고 살았으니, 가죽의 일부는 피부병을 가진 사람의 성난 피부처럼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난 가끔 벗겨져 거칠어진 가죽에 피부가 긁혀 아릴 때도 또 붉은 피를 볼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자리는 당연히 소파가 있을 곳이라 생각했다. 눈에 거슬렸지만 널따란 천을 사다가 덮어씌우기도 하고, TV홈쇼핑에서 떠들어대는 예쁘면서도 입히기 쉬운 소파커버를 사보기도 했다.
쓰레기통에 '휙' 버리는 것처럼 소파를 쉽게 버릴 수 없었다. 크고 무겁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소파가 이런 내 맘을 눈치채면 어쩌지란 마음도 내 안 구석에 자리했다. 무거운 가구를 옮겨주시는 분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마침내 그분들의 손에 의해서 소파는 현관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나의 소파는 재활용장 한가운데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자리했다.
대형 폐기물을 수거하는 요일은 정해져 있다.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파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여전히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소파,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기가 힘들었다. 다음 날도 소파는 그 자리에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소파 앞으로 지나가질 못해 금방 갈 수 있는 길을 조금 돌아서 나갔다. 소파에 눈과 입이 생긴 것만 같았다. 말이 안 되지만 소파에게서 날 원망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내 뒤통수를 보며 '날 떠나보낼 순 있지만 기억까지 버릴 필요는 없잖아? 왜 굳이 돌아가는 건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열흘 정도 지난날이었다. 아침부터 주방에 난 작은 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내 두 발은 소음에 이끌려 밖이 보이는 자리에 멈춰 섰고 곧이어 내 눈이 시끄러운 밖을 향했다. 한참을 밖에서 머물렀던 소파가 제 몸보다 훨씬 큰 트럭에 실렸다. 뒤돌아 소파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제야 내 눈에 깨끗해진 자리가 맺혔다.
순간 깨달았다. 정리가 가진 갖가지 의미 중 버리고 없애고 비우는 것, 그들 모두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난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 보다 떠남과 동시에 비워진 그리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자리를 맞이할 설렘에 들떠 있었다. 분명했다.
그래, 아마도 그날은 '감정 물건'을 버린 것이 아니라 '감정 자리'를 비워낸 것일지도 모른다.
커버이미지 : 사진: Unsplash의Gabriel Mer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