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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싫어하는

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by 운전하는고양이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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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Martin Widenka사진: Unsplash의Martin Widenka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의 두 발을 봤을 때 '아마도 길 위를 걷고 있는 꿈을 꾸는 중인가 봐'라는 생각을 했다. 꿈속에서도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꿈이 아니었다. 오른손 검지의 손톱 끝으로 엄지의 바닥 부분을 힘주어 밀었을 때 내 미간에 주름이 졌고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그날은 초록이 지천을 덮은 계절의 단편이었다. 그중에서도 태양의 열과 빛으로 널려있는 모든 수분이 말라 공중으로 흩어진 날이 아니라 흩어진 수분이 모였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말라버린 지상의 건조한 입이 촉촉하게 젖은 날이었다.


비 온 후, 초록의 아침은 유독 더 싱그럽다. 키가 작은 길가의 정원도 키가 큰 저 멀리 보이는 산도 모두 초록을 품었다. 하늘에서 내린 물방울이 초록에 묻어있다. 가까이 보이는 물방울과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물방울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쬐는 빛을 앞다퉈 반사했다. 그 덕에 비가 내린 뒤 초록의 아침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눈이 부셨다.


빛나는 싱그러움 사이를 걸으니 또한 일부가 듯했다.

싱그럽다. 맑고 깨끗하고 때 묻지 않은 본연의 날것. 거리 위에서 많은 날것들이 느껴졌다.


물기가 가득한 날은 향을 붙잡손을 가졌다. 거리 위 많은 것들이 그 손에 붙잡혀 날아가지 못하고 본연의 향을 내뱉었다. 실은 물을 머금고 더 단단하게 응집된 흙이지만 생명의 탄생을 위해 파헤쳐진 흙의 냄새가 났다. 분명 상처 없는 줄기였지만 부러뜨려야 보이는 관다발 속 미끌거리는 수분의 향이 느껴졌다. 잘려나간 곳 없는 나무에서도 거친 줄기를 죽 벗겨내야만 느낄 수 있는 잘 깎인 연필의 냄새를 맡았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 냄새를 싫어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이유야 다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경험한(?) 비 온 뒤 아침 거리 위 사람들은 바쁜 발과는 사뭇 다른, 길 위에서 머물러 있는 표정으로 저 나름대로 날것의 향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밝은 표정이었으므로 나 역시 향을 즐기는 것에 더해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도 싱그러워지는 아침이었다.


수십 년 간, 비 온 뒤 초록의 아침은 향과 사람을 느끼는 좋은 시간이었다. 100%라는 건 없다고 늘 말하는 나지만 이것만큼은 아무런 의심 없이 모두가 다 좋아할 거라고 분명히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상한 냄새가 나네. 아빤 비 온 뒤에 정말 기분이 안 좋아."



한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내 머리가 헤집어졌고 거기에 더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게 다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말이 되잖아. 어떻게 냄새가 싫을 수가 있지?'란 말 혹은 그와 비슷한 말이 공기 중 물방울에 붙잡혀 내 주위를 에워쌌다.


그 남자는 어깨 한쪽에 유치원 가방을 걸어 메고 한 다섯 살 남짓 돼 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걸어가며 왜 이 냄새가 싫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냄새'라는 단어만 빼고 듣는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남자가 쓰레기장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아침을 맞이한 단순하고 평범하고 어찌 보면 극도로 담백한 말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남자분께 죄송하지만- 내겐 욕설과 비슷하게 들렸다.


1%의 의심 없이 철석같이 그럴 거라고 믿은 것에 -생각해 보면 큰 문제도 아니지만- 대한 상반된 반응을 본 나는 잠깐의 빛나는 싱그러움 속 아침을 맛보고 잠자기 직전까지 뜨문뜨문 충격의 시간을 꺼내 곱씹었다.



*



"와, 배달음식 후기를 이렇게 쓰는 사람이 어딨어. 너 되게 웃기다."


마지막이 '웃기다'라는 말이었지만 난 전혀 웃기지 않았다. '웃기다'라는 말 끝의 표정이 정말 역겨웠기 때문이다.


난 음식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잘한다와는 다른 의미일 수 있다. 만드는 것, 먹는 것 그리고 음식을 앞에 두고 하는 대화 등등 모든 것을 좋아한다.


종종 입에 가득 우물거리면서도 '또또또 먹고 싶다' 혹은 '이거 내일 또 시켜 먹어야지' 하며 나 스스로에게 이 음식을 시켰음을 무한히 칭찬하게 되는, 그런 배달음식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 너무 맛있다고 직접 말해드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난 특히나 음식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때 유독 수선스러워지는 편인데 손은 박수를 쳤다가 손가락을 겹쳐 꼭 깍지를 꼈다가 눈 근처에서 짤랑거리기도 한다. 눈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모양이 자주 바뀐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내 입은 침이 마를 때도 어쩜 사방에 침을 튀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꽤 많은 것을 담아 후기를 썼다. 현관 밖에 놓여있는 쫑쫑 잘 묶인 통통한 비닐봉지 혹은 음식 박스가 놓여있는 모습을 봤을 때의 기쁨. 음식의 담음새와 포장을 뜯었을 때 나는 향기, 수저로 음식을 들어 올리고 맛본 첫 만남 그리고 다 먹었을 때의 아쉬움 등등. 모든 과정에서 느낀 감정과 때론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까지.


지나친 분들도 있었지만 찬찬히 살펴보고 그만큼의 댓글을 달아주신 분도 많았다. 나의 하루에 공감을 해주시거나 자신의 하루를 털어놓으신 분들도 있었고 재주문 때는 알아봐 주시는 분도 있었다.


별일 아니지만 그런 후기를 쓰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피해가 없으면 그냥 지나가면 것을. 그날 난 평가를 하며 깔깔대고 있는 역겨운 얼굴에 먹다 남은 김 빠진 콜라를 붓는 상상을 했다.




*



자는 중에 수시로 깨는 것, 나한테는 일상다반사다. 초록의 아침을 맛본 그날 밤 잠들 기 직전까지 뜨문뜨문 나던 생각은 고요한 새벽녘 이르게 눈이 떠졌을 때도 내 머릿속을 한 번 스쳐갔다.


 '아니 말 한마디로... 어떻게 이렇게 싱그러운 아침을 시궁창으로 만들 수가 있죠?'


평생의 믿음(?)을 순식간에 깨버린 그 남자를 붙잡고 말하는 내 얼굴에서 콜라를 부은 그날의 역겨운 표정을 봤다. 그리곤 생각했다.



...당신이 싫어하는 만큼 내가 더 좋아할게요.








커버이미지 출처 : 사진: UnsplashKarsten Wineg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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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모든 것에 해당하지 않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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