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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포도송이

by 운전하는 Y



꽃잎 몇 장에 걸 만큼 지금의 난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지.

그래도 그날에 다녀올 수 있다면 한 번은 해보고 싶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피어오른 물안개. 온몸을 순식간에 녹여낼 만큼 뜨거운 물방울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하나의 구멍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다 큰 어른의 몸을 모두 잠기게 할 만큼 커다랗고 하얗고 또 보통은 네모진, 그 안에 담긴 것은 녹일지 몰라도 자신은 절대 젖어 녹아내리지 않는 상자가 있습니다. 상자에 뜨거운 물이 점점 차오르고 상자가 머문 두 평 남짓한 곳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아득해집니다.


뒤돌아 서서 보는 과거도 손아귀에 있는 현재도 그리고 붙잡고 싶은 미래도 모두 흰 장막을 두른 것처럼 아련합니다. 뿌옇게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피로를 느낀 눈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립니다. 촘촘한 물안개는 눈은 어둡게 할지 몰라도 그 사이에 갇힌 향기는 어느 때보다도 농밀합니다.


눈을 감고 잡고 싶은 그날을 떠올려 봐요. 그날의 향기가 느껴질 거예요. 아주 농밀하게 말이죠.



*


어느 봄날의 놀이터입니다.


이 놀이터는 A동 B동, 두 개의 동을 가지고 있는 키가 작은 아파트의 큰 자랑입니다. 까슬한 모래가 두텁게 펼쳐져 있는, 그래서 아이들은 여름이 아니어도 해변가 모래사장을 느끼며 모래성을 쌓을 수 있었어요. 가끔은 그네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아이들 호주머니에서 쪼르르 흘러나온 동전들이 모래 속 깊이 숨기도 했습니다.


놀이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네도 한 쌍 있습니다. 기둥 옆에는 늘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앉았다가 섰다가, 뒤집혔다가 다시 제자리로. 나무로 된 딱딱한 그네의 엉덩이 받침은 그날의 조종사 마음에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돌아왔다, 내내 바빴죠. 그럴 때마다 두꺼운 그네 체인은 짤랑짤랑 철컹철컹 분주한 소리를 냈습니다.


조종사의 키가 커질수록 그네 체인의 키는 줄었습니다. 모래바닥에 가까웠던 체인은 본인이 매달린 하늘 위 기둥으로 한 바퀴 두 바퀴 굴려졌죠. 엉덩이 받침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그네 조종사의 마음도 높이 높이 자랐습니다.


자라고 싶은 마음을 가진 두 개의 발이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합니다. 힘주어 뒤로 갔다가 마치 앞으로 쏟아질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반대편 하늘 위에 다다라 있는 그네와 조종사. 놀이터 그네의 끝은 허공이었을까요.


놀이터 그네의 맞은편에는 거대한 등나무 넝쿨 쉼터가 있었어요. 플라타너스 나무의 두꺼운 줄기를 닮은 네 개의 인조나무 기둥을 빙글빙글 빙그르르르 감고 올라간 등나무 줄기는 한데 얽혀 하늘까지 감쌌습니다.


꽁꽁 언 모래에 난로 쬐러 갔던 작은 손들이 다시 분주히 모래를 쓰다듬고, 콧등을 베고 가던 바람이 성질을 잠재우고 베인 콧등을 어루만져줄 때. 거리의 사람들이 벚꽃, 목련, 개나리, 진달래... 봄바람에 속을 펼쳐 보인 꽃들에 한창 취했다가 깨어날 즈음.


놀이터 그네의 맞은편에 있던 등나무 쉼터에는 여름도 아닌데 포도송이가 열렸어요. 맞아요. 그래서 봄날의 정중앙, 놀이터에서는 신기한 포도향이 났어요.


그네를 탄 조종사의 발 끝은 연보랏빛 꽃송이를 향해 있어요. 조종사는 있는 힘껏 포도송이를 향해 발을 굴렸고 이윽고 발끝으로 포도송이를 터치했을 때, 그네 조종사는 흩날리는 포도의 낱알들 사이에서 연보랏빛 하늘을 날았습니다.


이르게 찾아온 포도향기에 취해 그네 조종사는 더 높이 더 세게 발을 굴립니다. 단단하지 않고 여린 포도송이를 찰 때는 소리가 나지 않아요. 그들이 흩날리며 춤출 때도 소리가 나지 않아요. 잠깐의 과거에서 또 그 과거에서 바라본 바로 앞 미래에 다다르는 그런 바람소리만이 놀이터를 가득 채웁니다. 휘이-거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나부끼는 연보랏빛 물결. 봄날의 놀이터는 눈을 감지 않아도 마치 꿈같았어요.


'툭'


정말 높이 오른 힘찬 그네 조종사의 발끝에서 포도알이 아닌 포도 한 송이가 떨어집니다. 그네 조종사는 맘이 급해져요. 구르던 발을 멈추고 그네 받침에서 엉덩이를 죽 빼 앉아 신발 안에 모래 알갱이가 마구 밀려들어올 정도로 모래바닥에 발을 비벼댑니다.


바삐 그네에서 내린 조종사는 얼른 떨어진 포도송이를 집어 들어요. 그러고선 말합니다.



"사준다. 안 사준다. 사준다. 안 사준다."

"비가 온다. 안 온다. 비가 온다. 안 온다."

"놀러 간다. 안 간다. 놀러 간다. 안 간다."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한다. 안 한다."


조종사의 말은 그때그때 달랐어요. 그렇지만 마음은 모두 같았죠.

'이뤄져라, 이뤄지길...' 하지만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포도송이에서 포도알들이 하나씩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르는 마음, 그냥 그 마음이 좋았다고 해요.



*


진한 포도향이 코 끝에 머물렀다가 사라집니다. 모든 걸 녹일 것 만 같았던 뜨거운 물은 어느새 식었고 앞을 가렸던 흰 장막도 살짝 걷혔습니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전보다는 조금 또렷해진 지금을 바라봅니다. 그네 조종사는 이제 등나무 꽃잎을 떼며 '그것과 그것이 아닌 걸' 점치지 않습니다. 안간힘을 써도 갈 수 없는 꽃잎을 떼던 그날에, 흐릿한 물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 이따금씩 다녀올 뿐입니다.


그네를 타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거예요. 그네는 앞을 향할 때보다 뒤로 갈 때 더 큰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래야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요.


길을 잃는다고 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그날은 여러 번 시도(?) 끝에 다녀왔어요.

힘껏 발을 굴려 떨어뜨린 포도 한 송이를 집어들고 웃었습니다. 그리고선 답이 정해져 있는 꽃잎점을 쳐봤습니다.


"잘 된다. 더 잘 된다. 더더 잘 된다. 마침내 잘 될 것이다."



잘 다녀왔습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Pixabay- Vogue0987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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