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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요란해 보여도 내버려 두기

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by 운전하는 Y


사진: Unsplash의Sunguk Kim

그날, 침실 안쪽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익숙한 소리지만 집에서 난다고 하면 이상한 소리가 되어 버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물 떨어지는 소리, 그것들이 침실 안쪽에서 들렸다.


바람 소리는 바퀴가 구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을 향해 굴러가는 바퀴가 아닌 뒤를 앞으로 착각하고 맹렬히 구르는 바퀴의 소리처럼 들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바퀴가 텅 빈 공중에 떠서 구르며 이는 바람의 소리였다. 휘이이잉- 소리가 마치 잉이이휘-로 들렸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린 아니지만 달팽이집 겉에 새겨진, 끝을 모르고 안으로 파고 도는 바람의 몸놀림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소리뿐이었지만 어지럽기엔 충분했다.


실은 몸에 힘이 들어가고 바싹 긴장을 했던 이유는 바람 소리보다 물 떨어지는 소리에서였다. 집에서 나는 물 관련 소리는 한정적인데 화장실, 주방, 세탁실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쓰지 않는 물로부터 나는 소리는 대부분 수도꼭지가 제 위치에 조금 모자란 듯 돌아와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바닥에 닿으며 뭉개지는 그런 (귀여운)소리였다.


침실 안쪽에서 난 물의 소리는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딘지 모를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껴지는 묵직한 듯 희미한 소리. 엄청난 부피와 질량의 물이 이미 엄청난 부피와 질량의 물로 떨어지는 소리. 높이가 느껴지는 소리. 어렴 풋이 들리는.... 비슷한 걸 말하자면 아주아주... 아주 먼 곳으로부터 느껴지는 폭포의 소리였다.


발걸음이 침실을 향했다. 침실 안 쪽 화장실 문을 열어 확인했다. 내가 화장실 문을 슬쩍 열어본 것은 단지 '물'이라는 것에 기반한 소리라는 것, 그 이유가 전부였다. 확인을 마친 후 뒤를 돌았고 그리곤 내 발이 멈췄다. 침실에 작은 책상을 뒀는데 소리의 근원은 책상, 그 위에 있는 노트북이었다.


들고나가지 않는 이상, 집에 있을 때 내 노트북은 늘 'ON' 상태다. 화면이 꺼져 있긴 하지만 캄캄한 화면 뒤로 요녀석들(누구를 말하는 건지...)이 무슨 짓을 해도 난 영원히 모를, 겉보기엔 꺼져 있지만 속은 켜져 있는 그런 상태 말이다.


예전에 우연히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를 보다가 그 세계를 풀어낸 방식에 입까지 벌리고 본 적이 있다. 아이콘으로 표현된 사람들과 운송 수단을 타고 이동하는 무수한 정보, 쓸데없이 팝팝 튀어나오는 팝업 광고에 잡혀가고 또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결제라는 비극을 맞기도 하고.... 알고리즘에 갇혀 조회수의 일원이 되기도 악성 코드에 노출되기도. 쉴 새 없이 생산되는 밈(meme)과 그 앞에서 엄지 따봉을 누르며 환호하는 아이콘(사람)들 등등등.


그 세계를 시각화 한 영화를 보고선 날 스쳐간 모든 데스크톱, 노트북들을 떠올리며 있었을 지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 '꺼지지 않는 전원, 새카만 화면 뒤에선 아주 난리도 아니었겠군'이라며 혼잣말을 했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노트북은 14인치 화이트 색상(이하 14화이트) 1대와 체감상 16인치인 15인치 블랙 색상(이하 15블랙) 1대다(15인치의 베젤이 아주 얇아서 둘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이 둘은 늘 반쪽 잠을 자는 까닭에 가끔씩 꼬장을 부렸다. 꼬장은 내 입장의 말일뿐, 그들 입장에서는 악덕 소유주로부터 노동 시간과 수면의 질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고자 하는 그들 나름의 목소리였다. 그날 꼬장의 주인공은 15블랙이었다.


15블랙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때가 작년 말인가, 올해 초였던가. 14화이트가 휴대성도 좋고 나름 애착이 형성된 상태라 좀 작고 버벅 거려도 자주 찾았었는데 작년 말인가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15블랙을 두드리고 있다. 꽤 오랜 시간 가방 안에서 좋은 성능을 묵혔던 게 답답했었는지 15블랙은 전원을 누르자마자 원하는 화면을 보여줬고 뭘 설치해도 다 잘 돌아가- 어떤 걸 재생시켜도 끊김 없이 또렷한 화질을 내어줘- 뭘 하든 쌩쌩쌩-이었다.


막힘없이 원하는 값을 내어주고 보여주고 읽어주고 찾아주고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았던 15블랙의 첫 문제점은 한두 달 전쯤 발생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정품 인증을 하라며 화면 아래에 사라지지 않는 반투명 글자를 새겨버렸다. 하는 일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영 눈에 거슬렸다. 개인설정이 막혀서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바탕화면을 못하는 것, 이게 일하는 데 있어서 심리적으로 굉장히! 꽤 큰 지장이었다.


시디키 값이 적힌 종이가 보이질 않았다. 명령프롬프트 보단 도스창이란 이름이 더 정겨운 까만 창을 열어 뭐라 뭐라 적어대고 깊게 깊게 꽁꽁 숨어있는 시디키 값을 찾아내 입력했는데 그래도 거슬리는 글자들은 사라지질 않았다.


그냥 썼다. 일할 때마다 거슬렸지만 당장은 그냥 썼다.


그러던 중 문제의 그날, 15블랙이 폭포 소리며 바람 소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 것이다. 노트북으로부터 그렇게 큰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15블랙을 가만히 쳐다봤다.


'너 너무 요란하다....'


그렇게 15블랙은 반나절 가까이 요란을 떨었다. 악덕 소유주로부터 '꺼지지 않는 전원'이라는 형벌(?)을 받은 15블랙은 마치 소유주를 조롱하듯이 스스로 꺼졌다가 켜졌다가를 반복하며 화면에 평소와 다른 것과 글자들을 띄워내며 광란의 난리부르스를 췄다. 아마 그 뒤에선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와 조금은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슬리는 글자들은 사라졌다.


가끔 기계로부터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언가를 느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자리가 꽉 찬 점심시간 무렵 음식점, 서빙로봇의 뒷모습에서 삐질대는 땀이 느껴진다던가 뭐 그런 거.


그날 15블랙에게서 땀 비슷한 걸 느꼈다.





무얼 스스로 해결한 거니, 난 네게 물었다.


지금 당장 요란하고 소란하고 분란하고 그럴지라도 스스로 단단하고 강하다고 믿는 다면 또 알고 있다면 요란 속에서도 제자리로 가는 길을 찾을 수 혹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다소 뻔뻔하게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15블랙이 말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andrew-bui






*14화이트도 고장 중인데... 언제 돌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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