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눈에 보이는 글자들에게서 폭포의 시작과 끝이 느껴질 때, 내 심장은 마치 누군가의 핏줄 선 손아귀에 갇힌 것마냥 거칠게 팔딱인다. 무의식 중에 반응하는 설렘.
낙차.
끝과 끝, 반대, 어쩌면 이어진, 결국 하나인. 전혀 다른 상황과 의미지만 그 둘이 함께 쓰이면 그것만으로도 둘은 하나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폭포의 시작에 있는 물과 끝에 다다른 물에게 닥친 상황이 다를지언정 한 발자국 떨어져 보면 그들은 그냥 하나의 폭포다. 낙차가 느껴지는 조합에 이상하게 몸이 반응하는 이유다. 둘 사이의 다름, 차이... 그리고 그런 그들의 결합, 하나. 맛있는 음식 앞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입 안이 흥건하게 젖어드는 것처럼 이 다름의 결합은 실로!!! 몸이 반응하는 '결합'이 아닐 수 없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여.
처음 본 그때부터 내 마음은 그대의 포로가 되었어요. 그대의 눈빛에 난 그만 눈 감았죠.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 사랑의 예감으로 떨렸죠. 그리고 운명처럼 사랑은 다가왔어요.
사랑은 누구라도 한다고 그렇게 쉽게 쉽게 만나죠. 그러나 우리 사랑 달라요 특별하니까.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 KBS 드라마 '첫사랑' 속 주정남의 노래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中
꽤 오랜만이다. 노래가 떠오른 것도 오랜만인데 떠오르게 만든 시작점도 정말 한참만이었다. 열흘 전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상이었을까.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배우 손현주를 만났다. SBS '우리들의 초콜릿 순간'이라는 2부작 드라마에서 그는 주인공의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었다.
신기하지. 그가 분투한 셀 수 없을 만큼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직접 본 작품들을 나열한다면 낱낱이 상당할 텐데 말이다. 늘 똑같아. 내게 손현주는 곧 주정남이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라고 노래하는 주정남. 일부러 구해서 입기도 힘들 것 같은 '팥죽색' 위아래 츄리닝을 입고 기타 소리에 목소리를 얹어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적인 사람, 주정남.
주정남을 처음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내 나이가 아마 손가락 열개를 접고 거기에 다섯 개 안짝으로 더 접었던 때였을 거다. 사춘기인 줄 모르고 사춘기 초입에서 헤매고 있었던, 생각이 봄을 맞은 것처럼 부풀고 만개해 가슴속이 자주 몽글몽글해지는데 왜 그러는지 당최 알 수가 없던 때.
마침 그때 KBS에서 새 드라마가 시작한다고 했다. 타이틀 '첫사랑'. 이미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화살이 꽂혔다. 최지우, 배용준, 최수종, 이승연 등 이름이 곧 힘이었던 배우들이 싹 다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설렘으로 시작한 드라마가 내 맘에 한 회 한 회 쌓였고, 계획에 없던 '주정남'의 자리도 생겼다.
'첫사랑' 속 주정남을 본 내 첫 반응은 '저 아저씨가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였다. 애정의 상대인 성찬옥(송채환)을 보며 왜 똑같은 말을 계속하고 있는지, 이미 보고 있는데 뭘 또 보고 싶다고 하는 건지, 그럼 눈앞에 있는 성찬옥은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낙차가 느껴지는 말로 노래하는 주정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상한 아저씨가 정말 정말 이상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왜지? 왜 주정남이 노래할 때 쿠션을 껴안고 있던 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까.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이 기분.
주정남의 노래를 들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팔랑이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반대편의 꼬리를 좇아 네게로 다시 내게로.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뫼비우스 띠 안에서 '애정은 뭘까. 사랑은 뭐지. 사랑의 종류는? 사랑의 기준은? 어떻게 사랑을 판단할까. 사랑을 하면 뭐가 좋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같은 길을 돌았다.
그러다가 사랑은 보고 싶은 거구나. 사랑의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사랑은 보고 싶은 거야. 어디서든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거야. 네가 멀리 있어도 네가 군중 속에 있어도 네가 바로 앞에 있을지라도. 계속 계속 보고 싶어. 사랑은 그런 걸 거야.
그때부터다. 십 대 소녀에게 주정남의 노래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도 사랑해!!!!!!'로 들리기 시작한 게 말이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랑 속에서 허우적 대는 사람들의 말은 한결같다. 나의 마음을 상대에게 주고 또 줘도 자꾸만 주고 싶고, 더하고 더해도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영 모자라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고. 결합과 결핍의 공존.
꾸밈없이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던 주정남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의 노래가 귓가에서 맴돈다. 주정남의 노래를 듣고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던 십 대 소녀는 어느새 열 개의 손가락을 N바퀴 돌려야 나이를 알릴 수 있는, 완벽한 어른은 아니지만 '어른이' 정도는 되었다. 다시금 생각해 보는 그의 노래.
내가 많았으면 좋겠어. 네게 주고 싶은 사랑의 개수만큼 내가 많았으면 좋겠어.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 앞에 있는 널 볼 거야. 그럼 또 다른 나 역시 사랑의 눈빛을 네게 전하고 싶겠지. 너에게 줄 사랑이 많을수록 난 네가 더 그리울 거야. 네가 더 보고 싶을 거야.
커버 이미지 출처 : 사진: Unsplash의Zulmaury Saaved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