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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와 땔감

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by 운전하는 Y
brigitte-tohm-rHtgXu4ekXA-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Brigitte Tohm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사계절이 거리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나온 어느 날의 이야기다.


거리 위 사람들의 옷차림만으로는 계절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절기 상으론 겨울 맞을 준비에 한창인 11월 초순. 어찌 된 까닭인지 한낮 기온은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로 20도를 웃돌았고 해가 떨어진 뒤에는 시린 바람이 마중을 나온, 영하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듯했다.


난 일 년 중에 한여름이라고 불리는 두어 달을 제외하고는 '추워'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펄펄 끓는 찜통더위 속에서 한참 동안 '찜' 상태로 있다가도 실내로 들어와 차가운 에어컨 바람 몇 줄기 맛보면 몸이 금방 식어버린다. 여름에도 얇은 긴팔을 입거나 반드시 챙겨 다녀야 하는 이유다.


더웠다가 추워질 때 한기에 맞서는 몸의 능력치가 저점을 찍는데 그래서 난 여름에서 가을(요즘은 여름에서 거의 겨울로 바로 가더라)로 접어들 때의 온도차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마치 살에 상처를 내듯 날카롭게 부는 겨울의 칼바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을바람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은 여름 뒤의 계절을 맞을 때 가장 큰 움직임으로 움츠렸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유난히도 변덕스러운 날씨였던 그날은 나 역시도 하루에 옷매무새를 여러 번 고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분명 낮에는 반팔에 외투를 입고선 '덥다'를 외치며 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는데, 밤에는 반팔 위에 털이 보송보송한 니트를 껴입고도 그 위에 또 외투를 겹쳐 입고서도 '아 추워'를 반복하며 핫팩을 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 그런 유난스러운 사람 말이다.



기분 좋은 외출의 끝자락, 지하철에서 내려 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시계의 짧은 시곗바늘이 9와 10 사이를 가리키고 있는 밤의 시작. 내 옷장 안에 다소 얇은 여름옷들이 깊은 안쪽으로 자리를 이동한 것처럼 태양 역시 긴 여름의 혹독한 잔업에서 벗어났다며 환호를 지르고 일찌감치 꽁무니를 뺐다. 낮과 다른 바람이 분지 이미 몇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바람의 찬 기운은 꽤 깊었다. 코 끝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높지 않은 코지만 그나마 솟아있어서... 여름 다음 계절의 바람이 불면 그렇게 코가 시릴 수가 없다. 습했던 낮의 공기와 확실히 다르다. 건조해서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날은 유독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질 않았다.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주는 안내판만 멍하니 보면서 난 '사라진 노선은 안내판에서 지워주시지'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버스를 자주 타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전부터 두 개의 비슷한 버스 번호가 자꾸만 눈을 어지럽게 했다. 현실에선 사라졌지만 안내판 속에서 아직 살아있는 버스 번호 옆에 '운영종료'란 글자에 속아 '아 버스 막차 끊겼네'라고 말하며 택시를 잡아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날엔 이미 사라진 버스라는 걸 인지했다, 아니 해냈다.


"아 추워, 추워, 추워, 춰어어어!!"


나의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약 20분 정도 남았다. 여름이 떠나자마자 손발이 땡땡하게 차가워진 수족냉증 사람의 몸이 점점 오그라들었다. 껴입은 옷을 비웃듯 어깨날갯죽지에도 누군가가 얼음물을 붓는 거 같았다. 역에서 나오기 전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것도 이날 추위에 힘을 보탰다. 여름이 가고 찬 바람이 불 때쯤 몰려드는 두려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밖에서 손 씻기'다. 가뜩이나 수족냉증인데 가을, 겨울 바깥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면 그 길로 내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뭔 짓을 해도 좀처럼 데워지지가 않는 거다.


손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발은 답도 없이, 집 밖과 안을 굳이 따지지 않는 주야장천 냉동 상태다. 집에서도 여름이 갈까 말까 하는 어정쩡한 시기부터 발은 춥다고 아우성이다. 처음엔 양말 그다음엔 수면 양말 다음엔 두꺼운 기모양말을 신겨 냉기를 쫓아내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도 다 합쳐졌을 때 그 안에 얇은 핫팩을 쑤셔 넣었을 때 그나마 발에 온기가 찾아든다. 양말과 핫팩의 콤보로 난 발 밑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집안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키는 한 2cm 정도 커지는 효과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치수 큰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두꺼운 양말...


신발 속 아우성인 발은 외면하고 바깥으로 보이는 살들을 구겨 옷 안쪽으로 밀어 넣고선 시간이 줄지 않는 안내판을 노려봤다. 차를 두고 나왔을 땐 최대한 서 있으려 하고 또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날따라 그런 마음가짐을 지하철 역에 두고 나왔는지 줄지 않는 안내판 시간에 지쳤는지 버스정류장 의자 앞으로 자리를 옮겨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마치 사회초년 시절,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안에서 '누가 누가 먼저 일어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봤던 거처럼.


아! 역시 그때의 촉이 아직 살아있었나 보다. 내가 예측했던 자리의 사람이 일어났다. '운이 좋구먼!' 하며 난 의자에 앉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지금은 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뭐야, 저분. 얼마나 몸이 뜨끈하면... 이렇게 의자가 뜨뜻하다고???'


너무 놀란 난 의자를 또 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분이 탄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질 못했다. 사실 좀 식으라고 서있었던 것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열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이상한 거다. 짧은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치고 갔다.


'저분의 몸속에는 분명 아궁이가 있을 거야. 땔감도 많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뜨거울 수가 없어. 그럼 난 아궁이가 없나?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사실 내가 추위를 많이 타는 건 날씨 탓이 아닐지도 몰라. 나한테 아궁이가 없는 거지. 아니야. 아궁이는 있을 수 있어. 그럼 땔감이 없는 건가. 아니면 땔감도 있긴 한데... 영 시원찮은 땔감인가. 불이 안 붙는 거지....'


정말 저런 너무 이상하고 시답지 않은 별별 생각을 그 짧은 시간에 하고선 의자에 앉으려는데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글자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 이 의자는 시범사업의 일환이고.....(중략)........ 열선이......(어쩌고저쩌고)..... 온열의자입니다. -


참나, 열선이 들어앉은 의자에 앉아놓고선 아궁이가 어쩌고 땔감이 어쩌고 속 시커먼 변태처럼 그분의 체온을 느꼈네 어쩌고 그런 것이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면서 화끈거렸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다행이다. 아궁이가 있긴 하구나. 땔감도 그럭저럭 쓸 순 있나 봐. 불이 붙는 걸 보니...'





*

얼마 전에 또 온열의자를 봤는데 이름이 재밌었다.

'말 거는 의자' ㅎㅎ


아. 시간 오류.. 7-8시가 아니라 9-10시였다...



커버이미지 출처 : 사진: UnsplashAshim D’Sil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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