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77번, 78번째
“나는 눈을 감는다. 잠이 달아날까봐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중략)
여기 내 누이가 있다. 그리고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내 친구들 몇 명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세 가지 음으로 이루어진 경적 소리, 딱딱한 침대, 옆으로 밀어버리고 싶지만 나보다 훨씬 힘이 세기 때문에 잠을 깨울까 두려운 내 옆 사람 이야기다. 우리의 허기, 이 검사, 내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가 피가 나니까 가서 씻고 오라고 한 카포(수용소 내 나치가 협력자로 삼은 유대인)에 대해 산만하게 이야기한다. 내 집에 돌아와 친한 사람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렬하고 구체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게 빤히 보인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눈다. 누이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난다.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 현실감각이나, 갑자기 침입하는 외적 요인 따위에 길들여지지 않는 순순한 상태의 고통이다. 어린아이들을 울리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다. 다시 한 번 표면으로 헤엄쳐올라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눈을 뜬다. 내가 실제로 깨어 있음을 확인해줄 어떤 것을 내 눈앞에서 찾기 위해서.
아직도 따뜻한 꿈이 내 앞에 있다. 잠을 깨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 이것이 우연한 꿈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이미 꿨던 꿈이라는, 상황이나 세부 사항들도 거의 바뀌지 않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꿨던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완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꿈 이야기를 이미 알베르토에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기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프리모 레비, ‘우리의 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이탈리아어 초판, 1947년 간행)
절멸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화학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7년생)는 수용소에 있을 때 되풀이 하여 위와 같은 꿈을 꾼다. 집에 돌아가 누이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는 꿈. 감내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증언의 불가능성을 애초에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40여년간 줄곧 그 고통을 말하던 레비. <주기율표>, <고통에 반대하며>, <휴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 많은 저작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증언을 남긴 그는 1987년 자택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이태원에서 일어난 10.29 대형 참사가 전해진 주말이 지나 월요일 10월 31일. 일이 있어서 서울 시내 여러 지역을 돌고 있다가, 곳곳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동하는 구가 바뀔 때마다, 구마다 분향소를 마련했다는 알림 문자를 받았다. 딱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이한 느낌이 들었는데, 나중에 그렇게 분향소가 차려지는 시간 동안에도 자녀를 찾아 병원을 헤맨 가족들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 아니, 아주 나중에 알게 된 것도 아니다. 이튿날 11월 1일 뉴스를 보고서 알게 된 이런 현실에 말문이 막혔다.
그 주 주말 11월 5일. 토요일인데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야구 중계를 켜놓고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안 되겠어서, 촛불행동의 추모 집회를 갔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갔어서, 정류장에 내리기 전, 나는 버스 속에서 시청역 출구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763m 거리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 대오에 합류했다.
참사 당시 현장에서 목격하고 사람들을 도운 김운기님의 발언부터 들었다. 일부를 옮겨 써본다.
“혹시라도 어떻게라도 힘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골목을 돌아서 안쪽으로 들어갔으나 안쪽 또한 이미 앞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모두 다 힘을 합쳐서 소리를 지르면서 길을 트고 있었습니다. 길을 트고 있었고, 일부 미국 군인들이 질서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안쪽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길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 같이 힘을 모아서 길을 트고 쓰러진 분들을 들고 큰길로 나가서, 어떻게 하든, 나라가 제공하는, 그들을 옮길 수 있는 지점까지 옮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들과 함께 한 명이라도 더 돕고자 심폐소생술과 희생자들을 나르는 것을 같이 했었는데요. 그 끔찍한 상황은 한 시간, 두 시간이 넘도록 지속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빌고 있었습니다. 그냥 다친 사람들만 있을 뿐이지, 희생된 사람들이 없기를. 너무나도 바랬었습니다. 그러나 한 두 명씩 머리 위로 모포가 덮혀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최초부터 심폐소생술 했던 사람들이 탈진해서 그들조차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몇몇 매스컴과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민들이 무질서하지 않았다는 점을 그 자리에서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 같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살릴 수 있도록, 다 같이 모여서 모두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같이 희생자를 한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살릴 수 있도록 큰길로 옮기고, 차후에 도착한 안전요원들을 어떻게든 도와서, 더 많은 사람들이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서, 한국의 시민의식은 나쁘지 않다, 그걸 제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현장에서 저는 똑똑히 봤습니다. 우리 보통 시민을 도왔던 것은 보통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4.16 안전사회연구소 장훈 소장님의 발언이 이어졌다. 전체를 옮겨 써보겠다.
“단원고 2학년 8반 장준영 아빠 장훈입니다. 저는 2014년 4월 16일 내 목숨보다 사랑한 준영이를 잃은 부모입니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2014년 4월 16일 우리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잡아달라고 곡기 끊고 단식했던, 한 아이의 아빠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9년.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피눈물 나게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할로윈 저녁 수많은 젊은이들을 우리는 또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내 아이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 이태원 참사 때도 우리 아이들, 우리 젊은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머릿속에 텅 비어 버렸습니다.
저는 일산에 삽니다. 일산에는 아홉분이 넘는 희생자분들이 계시더군요. 저 혼자 국화꽃을 들고 분향소에 가서 조문하였습니다. 하지만 차마 국화꽃을 고인들 앞에 올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희생자분들이 꺼져가는 의식으로 삶을 붙들고 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겹겹이 쌓여 계셨을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국화꽃 한 송이, 그 작은 꽃잎들조차 무거울까 봐 놓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참사 유가족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참사가 나고 장례절차가 다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사랑하는 가족의 빈 자리를 가슴 저리게 느낍니다. 아이가 없는 빈방, 아이가 없는 식사 시간, 아이가 없는 아침, 아이가 없는 내 가족, 아이가 없는 내 삶. 지옥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때부터가 아마 지옥보다 더 끔찍한 하루하루가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과 함께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유가족에게 애도는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 분명히 알고 가해자들 모두 제대로 처벌받고 그 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겁니다. 내 아이가, 내 가족이 왜 이런 참사에 희생되었는가를 알아야 애도할 수 있고, 슬퍼할 수 있습니다.
이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절대 놀러 가서 죽은 게 아닙니다. 놀면서 국민을 지키지 않은 자들의 잘못 때문에 죽은 겁니다.
이번 참사를 지켜보며 쓰디쓴 의문이 생겼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정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것입니까? 일상의 안전이 무너지고, 대형 참사가 반복되지 말자고 들었던 촛불 아니었나요?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는 저 같은 불행한 유가족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촛불을 들지 않았습니까. 무고하게 희생당해 하늘의 별이 된 304분이 참사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게 하자고 촛불을 들지 않았나요. 왜 또다시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단언하건대, 그건 책임자 처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권한에 비례하는 책임의 무게를 소홀히 하고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세상 바로 그 세상, 그 반복된 역사 때문에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아이들을 잃었고 또다시 이태원 참사에서 꽃 같은 젊은이들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우리 아이들 죽음의 책임자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번 이태원 참사로 우리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누군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자들에게 책임지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자들에게 책임지라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자들을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각에서는 일단 애도부터 하자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애도는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사람들이 처벌을 받은 다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9년 전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고 던졌던 그 질문을, 다시 윤석열 정권에게 묻고 싶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면 도대체 그 존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번 이태원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이 땅에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이태원 참사 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함께 싸우겠습니다. 다시 신발끈 동여매고 함께 하겠습니다.”
추모 집회를 마치고 우연히 마주친 지인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서 걸었다. 시청광장을 지나 청계광장으로, 청계광장을 지나 광화문광장으로 걸었다. 광장으로 걸었다. 현대사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절규하는 비통함과 들끓는 애통함과 더 나은 삶에 대한 염원이 담긴 공간에 좀 더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가게 앞에서 하수구 위로 쓰러진 화분을 보았다. 화분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걷는다. 올봄인지 여름인지 플로깅을 하다가 인도 도로가에 쓰러진 화분을 발견하고 딱히 이유없이 일으켜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날 귀가길의 기분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초판 표지가 떠오른다. 차마 여기에 초판 표지 이미지를 올릴 수가 없다.
스쳐 지나간다 /
옛사랑이 피를 뚝뚝 떨어뜨린 /
그 길목 그 모퉁이 /
그 구덩이 /
그곳에 있었을 나는 넘치도록 나이를 먹고 / (중략)
나무여, 스스로 흔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무여 /
이토록 봄은 그저 /
회오를 흩뿌리며 되살아난다.
-김시종 <사월이여, 머언 날이여> 중에서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고 그의 증언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레비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어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레비가 남긴 증언자로서 발자취, 그러니까 그가 그의 삶에 스스로 부과했던 공적인 책무의 길을 생각할 때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이런 설명은 단순하고도 무례하게 느껴졌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며 강제노동을 통해 몰살을 행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자신을 쏟아부은 증언의 시간을 뒤로 한채 왜 세상을 등졌느냐고 여러 번 묻고 생각했다. 그가 증언을 시작한 1947년 간행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증언의 불가능성을 예감한 구절은 체한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걸려 있었는데 이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증언자라는 존재는, 어떤 한계를 넘는 체험을 증언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 할 수 없고 안 하면 안 되는, 그런 모순에 처한 이들이라는 겁니다. 레비는 그런 아포리아(해결할 수 없는 난제) 때문에 죽어간 사람입니다. ‘증언하기 위해서 살아왔다. 그런데 증언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제 삶의 가장 깊은 물음이 생긴 겁니다.”
서경식, ‘역사와의 만남 - 기억하기, 증언하기, 저항하기’ <만남> 중에서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11월 4일 서울 시청 앞 분향소에서 근조화환을 쓰러뜨리며 항의하다가 끌려난 유가족 여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는 “만약 나 같아도 그렇게 했었을 것”이라고 “당장 뛰쳐가서 뒤엎었을 것”이라고 했다. 긴 세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기계에 몸이 끼어서 다친 동료도 직접 본 경험이 있어 안전사고를 늘 염려하는 엄마의 말을 들으니, 끌려난 유가족의 모습이 더욱 마음 아프다. 부모는 자식을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이곳저곳 애타게 다니고 있는 와중인데, 저런 분향소를 과연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고 만들었는가? 2022년 10월 30일, 대통령은 유가족의 허락을 구하고 애도기간을 선포했는가?
엊그제는 또, 자녀를 찾을 때 112에도 다산콜센터에도 신고를 하기도 했다는 유가족을 알게 됐다. 신분증이 자녀 곁에 놓여 있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지역의 장례식장에 가서 확인하여 자녀를 데리고 왔다는 서울의 유가족 증언.
"현장에서 운영을 관리했는지 모르겠지만 옆에 핸드백도 있고 신분증, 지갑도 있고 했는데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 현장에 인적 사항들은 있으니까 바로 평택 장례식장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장례식장에 안치를 하든, 아니면 딸의 신분증이 있으니까 저희한테 바로 연락을 해주시던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어요. 일요일 몇 시간 초조하게 기다리고 안타까운 시간을 가졌었죠. 지금 원인이 인재라고도 하고, 또 이런 재난이라고 정부에서도 그러고 여러 가지 국가기관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문제가 발생됐으면, 여기에 대한 합당한 조사도, 우리 유가족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런 조사도 하고 또 거기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하면 명확한 책임도 가려야 돼고, 그리고 앞으로 이런 참사가 제 아이뿐만 아니라 어디 어느 곳 어느 시간 어떻게 또 발생될지 모르잖아요. 그런 장치들이 없으니까 거기에 대한 확실한 장치 같은 걸 좀 마련해주셨으면 그런 바람입니다. 전혀 다른 유가족들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게, 방법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만나서 고통을 서로 나누고, 또 이 참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서로 교환하고 근데 그런 게 없으니까 지금 저도 답답합니다. (중략) 제 딸의 희생을 여러분들이 애도해주시고 지금 하는 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이런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조금만 이태원 그런 죽음의 현장에서 목숨을 다한 그런 희생자들을 위해서 조금만 아픔을 같이 동참하고 위로를 해주셨으면 그런 바람입니다. "
11월 12일 촛불집회 유가족 영상인터뷰 중에서
소방서니 다산콜센터니 압수수색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는 뭘 조사한다는 것인가. 자신이 권한을 행사하면 특검을 구성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않고 경찰청 특수본이 난데없이 다산콜센터를 압수수색하는 걸 내버려 두고 있는 법무부 장관 한동훈. 기타 행안부 장관 이상민, 국무총리 한덕수 이들의 부적절한 언행은 거론조차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국민이 권력을 부여한 선출권력인데도 책임을 지지 않는 위인들에 대해서는 한번은 짚어야겠다.
“핼러윈 데이는 주최자가 없으니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던 박희영 용산구청장. 자신이 구의원이었던 시절에 이태원이 위치한 자기가족 소유의 부동산 앞 도로를 정비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한 바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사고가 벌어진 것은 서울시가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만, 질서 유지나 안전관리 의무까지 서울시에 생긴다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고 한 오세훈 서울시장. (2022년 11월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발언) 참사 사흘째에 눈물 흘리는 회견을 하며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책임소재를) 언급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란 소리를 하고서 저런 소리를 또 했다. 그리고 애당초 이런 인재의 씨앗을 뿌려놓은 대통령도 언제까지나 기억하겠다.
“전시에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윤석열, 2022년 6월 22일 원전산업 협력업체 간담회 발언 중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면서 위인들의 부역자 노릇을 하는 천태만상을 앞에 두고, 나는 ‘이것이 인간인가’ 되뇐다. 이것이 인간인가. Se questo è un uomo. 이런 인간들을 냉철히 직시하면서, 레비처럼, 아마도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 저항을 통해 삶에서 깊은 물음을 던지는 이들. 증언자들.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폭력의 그림자가 여태껏 짙게 드리운 가운데,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가 그리하듯 냉담하고 초연하게(어원 그대로 '쿨cool' 하게) 사는 태도를 거부하고, 동시에 그런 '쿨'한 노예를 부리며 행세하는 주인이 되기 또한 거부한다. 그러고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껴안고서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마트에 갔는데, SPC의 제품들이 팔리지 않아서 대폭 할인판매로 무더기로 나왔는데도, 아무도 집어가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할인매대에 놓여 있는 것을 봤다. 전날도 다음날도 똑같이 그대로 있었다. 불매운동이 아주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촛불집회에서는 암투병을 하시면서도 자원봉사를 하는 분이 있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목격하며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고 있는 듯한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해보게 된다.
폭력의 시대. 증언자들은 슬픔과 두려움을 뚫고나와 자신의 악몽과 같은 시간을, 그리고 악몽과 같은 시대를 끝낼 것이다.
이태원에서 돌아가신 158명(2022년 11월 15일 현재) 여러분의 명복을 빕니다. 이런 것밖에 못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