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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Feb 14. 2023

제대로

플로깅 82번 83번 84번째

햇살 비치는 날이면 이제 제법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아니 딱히 따스하다할 수는 없지만 마냥 옷깃만 여며야 할듯 차지는 않은 바람이. 이번 겨울은 해를 넘기면서도 해를 넘기는 것 같지 않았었다. 쌓인 과제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내앞에 답답한 숙제처럼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마주하려 노력했다.       


집앞 골목에서 마스크랑 꽁초랑 유인물이랑 줍줍 (차 번호판 가리려고 스티커 붙였어요~)


겨울 끝에 프레드릭 배크만 <일생일대의 거래>, 김애란 <바깥은 여름>,  이연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단편소설, 에세이 이 세 작품 모두 여운이 길게 남고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문득 나를 찾아온 행운 같은 이 작품들 덕분에, 당장 오늘 내일이든 아니면 오랜 시간 후이든 간에 언젠가 삶을 마칠 날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삶에서 고귀한 가치나 소중한 지혜를 아주 조금이나마 남길 수 있다면,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올 그날에 나는, 내가 사랑한 어느 누구한테서조차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다, 최소한으로만 기억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역시 집앞 골목. 떨어져 있는 플라스틱 조각들. 유리 못지 않게 날카롭다. 조심조심 장갑끼고 줍다.(집게로는 안 집어짐)


유가족이 마련한 10.29참사 분향소에 갔을 때, 위로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만 내가 울고 말았다. 그분들의 손을 붙잡고 있으려니 (아 나는 주책맞게도) 갑작스레 그날이, 이루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나의 큰 상실의 그날들이 저절로 생각이 나고 말았다. 3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뭐라고 단 한마디조차 말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슬펐었는데 지금도 가끔, 아니 좀 자주 그렇다. 잘 웃고 밥도 잘 먹고 놀 거 놀고 다 잘 하고 사는데, 남들이 보면 뭐 저래 싶을텐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은 큰비 내리듯 우는 그런 날들이 여전히 있다. 해가 뜨고 질 때면, 눈물이 왈칵.


길에서 난데 없이 아깝디 아까운 젊은 목숨을 잃고, 마약 부검까지 한다며 오명을 쓰고, 죽음의 진상이 가려져 있어 얼마나 힘들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유가족들께, 내가 도리어 위로를 받고 왔다. 그래도 죄송하다는 말씀은 직접 전할 수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인재가 이렇게 벌어지고, 이에 더해 어처구니없는 2차가해가 난무하는 상황이 정말로 죄송하다. 또 안전과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단지 유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 다뤄져야 하고 반드시 모든 진상이 낱낱이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추운 날도 나름대로 애를 쓰며 살려고 하다 보니, 그 사이 겨울이 끝나고 내 마음으로 진짜로 해를 넘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둣 한 계절을 잘 나고, 그래도 봄을 맞이하긴 하는 것 같다. 덤덤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다보면 좋은 새봄, 제대로 된 새봄이 오겠지. 끝까지 진실을 따라가기 위해 슬픈 사람의 편이 되겠다.


2022년 마지막날 12월 31일, 집앞 골목의 유리조각을 빗자루로 쓸어담으면서. (유리를 싼 종이가 인명, 지명 나온 유인물이라 스티커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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