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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Feb 24. 2023

역설

플로깅 91번째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역 앞.  마스크 몇 개를 주워서 근처 공공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서 집 앞에 내 쓰레기를 내놓는다. 청량음료 캔을 모아서 분리배출한 것을 들고서, 골목에 떨어진 플라스틱 음료컵이랑 꽁초 등 쓰레기 몇몇 개를 주웠다. 마침 옆에서 폐지를 주우시는 어르신이 계셔서, 내가 들고 있는 캔 분리배출 봉지를 가져가시라고 드렸다. 어르신은 냉큼 들고 가져가시더시만, 이내 캔 봉지를 이리저리 살피신다. 내가 건넨 캔 양이 상당하다.


 ‘어? 왜 저러시지? 캔속 내용물 다 비우고서 물로도 한 번 헹궈서 안 더러운데? 아직 날도 추운데 어서 챙겨 가시지…….’    


전철역 앞에서 마스크 줍줍


나이와 관심사에 걸맞지 않게(?), 나는 청량음료를 좋아한다.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는 물은 다 좋아해서 여름에는 거의 매일 탄산수를 마시고, 겨울에도 사흘 걸러 한 번씩은 콜라,사이다,환타 중 하나를 마신다. 십대, 이십대 때도 청량음료는 별로 안 마셨는데, 마흔이 넘고부터 달라졌다. 매일 내 몸의 많은 세포가 죽고 다시 살아나니까 세포 관점으로 보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른 인간이다. 한 인간 안에도 특정 시점에 과거와 정반대의 취향이 있다는 건 그다지 신기한 건 아닐 터이다. 적어도 청량음료 섭취만 놓고 보면, 마흔 무렵 시점에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다.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접히고, 한 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이다. 생명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생물과 무생물 사이> 중에서


마흔에 한라산을 등반하였다. 아이젠을 끼고 올라갈 때는 화창한 날씨였는데, 중턱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백록담은 못 보고,컵라면만 먹고, 눈보라 가운데 부들부들 떨면서 하산


그래서일까? 처음에 플로깅 시작할 때 길바닥에 떨어진 청량음료 캔을 구경하고 줍는 게 매우 기분 좋았다. 바람에, 또 어쩌면 사람들의 발길질에 이리로 저리로 아스팔트를 굴러다니다가, 차 바퀴에 깔려 어느새 납작해진 청량음료 캔. 마치 팝아트 작품 같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점점 길거리에 떨어진 음료캔은 점점 줍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폐지 줍는 어르신들, 또 코로나 이후 대거 늘어난 듯한 비교적 젊은 어르신들이 눈 깜짝할 새에 길바닥에 떨어진 캔을 수거하시는 걸 봐서이다. 고물상에 가져가면 알루미늄캔 가격이 후하다고 들었다.     



“아, 여기 철캔이 들어 있네요. 철캔은 안 돼요. 돈이 너무 안 돼요.”      


앗. 청량음료 캔은 모두 알루미늄으로 된 캔만 있는 줄 알았고 통조림캔만 철캔인 줄 알았는데, 가로등 불빛에 비춰 보니 과연 내가 배출한 청량음료 캔 가운데에도 철캔이 섞여 있다. 나중에 통계청 자료(하위 분류: 환경/재활용가능자원가격조사/지역 및 품목별 가격현황)를 찾아봤다.


알루미늄 캔은 1kg에 1243원, 철 캔 가격은 1kg에 317원. (2023년 수도권 가격. 비수도권은 더 낮다.)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92&tblId=DT_AA13      


알루미늄 캔 가격과 철 캔 가격은 무려 네 배 차이.


어르신 말씀 그대로였다. 어차피 무거운 폐지와 캔을 수거해서 고물상에 가져가는데, 조금이라도 돈이 더 되는 알루미늄캔만 집어가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알루미늄 가격이 비싼 이유는 뭐냐 하면, 알루미늄이 생산 공정에서 대량의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알루미늄 1톤생산하려면 약 1만 4천 kWh의 전기가 필요하다. 한국인 1인당 연간 전력소비량이 약 1만 kWh니까, 막대한 전력이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알루미늄은 발전 단가가 낮은 국가 즉 국토 면적이 넓어 수력자원이 풍부하거나, 산유국이나 석탄보유국에서 많이 생산된다.




그동안 쓰레기 수거날에 플로깅을 하다가 동네 주민들이 어르신들을 세워놓고 혼을 내는 광경을 몇 번 목격했었다. 쓰레기 수거날이면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돌아다니는 어르신들이 분리배출이 잘 안 된 플라스틱 배출 봉지 속에서 알루미늄캔을 찾아서 꺼내 가져가고 계셨는데, 쓰레기를 내놓으러 나온 주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 언짢아했다.


어르신들은 알루미늄캔만 골라서 가져가시느라고 플라스틱 분리배출 봉지를 뜯으시는데, 신참으로 보이는 어르신 몇몇 분은 본인이 찢은 봉지를 그대로 두고 가시기 때문이다. 뜯어진 봉지에서 온갖 플라스틱 제품들이 날리고 골목 곳곳에 떨어지니까, “이렇게 뜯어놓고 가면 어쩌느냐?”고 동네 주민들이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잘못을 따지자면, 애초에 잘못은 플라스틱 쓰레기 속에 알루미늄캔을 섞어서 버린 주민들에게 있는데,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렇게도 혼이 나는데,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자기보다 젊은(중년의) 주민들에게 반말을 함부로 하시는 모습은 못 봤다. 아마도 주민들의 쓰레기에 기대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르신을 꾸짖는 주민들은, 플라스틱 쓰레기 속에 알루미늄캔을 섞어서 버리는 주민한테는 목청을 높여 혼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동등한’ 주민에게는 화를 내지는 않는다. 기후위기의 시대이지만, 대개 우리는 알루미늄 재활용으로 탄소 배출 감량에 공로가 있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께 그에 합당한 존경심을 보내지는 않는다. 대신 만에 하나 나도 미래에 폐지 주으며 살게 될까 걱정하기도 하며, 때로 동정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분리배출을 깔끔하게 잘 해온 주민한테서, 몹시도 혼쭐이 난 어르신 한 분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을 보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옆에서 쓰레기를 줍다가 “그만하시죠.”하고 그 주민을 말렸는데, 그 주민은 내게도 “아줌마! 이렇게 일일이 떨어진 쓰레기 주울 필요가 없이, CCTV를 달아달라고 내일이라도 당장 주민센터에 이야기를 해요!”하고 훈수를 두고 갔다.


무례함에 짜증이 좀 났지만, 그 주민의 말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예전에 이미 나는 CCTV를 달아본 적이 있다. 평소 우리 동네 쓰레기터에 불법 투기 대형쓰레기가 좀 심해서였다. 쓰레기터 불법 대형쓰레기로 인해 하수구가 막힌 적도 있던 터라 심각성을 인지한 주민센터에서도 CCTV를 달아줬다. 그런데 CCTV를 달아도 별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유는 추측컨대 이러하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이런 불법 투기 쓰레기는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내놓은 게 아니고, 지나가는 차량에서 내던진 것들이었다.


CCTV는 한 반년 가량 집앞에 있다가, 코로나 발생 이후 2020년 봄이 지나서, 우리 골목보다 더 심각한 곳으로 옮겨갔다.


그 후에 내가 돌아다니면서 유심히 보니까 쓰레기 배출요일과 배출시간만 간단히 적은 X-배너를 설치한 곳이 비교적 쓰레기가 적었다. 그래서 통장님과 상의해서 주민센터에 말해서 우리 골목에 X-배너를 설치했다. X-배너는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인데 눈에 잘 띈다. "월수금 일몰 후 쓰레기 배출"이라고 씌여 있다. 쓰레기양을 따로 측정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CCTV보다는 마구잡이 쓰레기가 줄어드는 효과가 컸다. 그리고 X-배너만 달랑 있는 것 보다는, 단 한 두개라도 골목 쓰레기를 줍는 게 나은 것 같다. CCTV가 만능이 아니다.


감시를 하면 반드시 분류가 생깁니다.그 사람이 위험한가, 위험하지 않은가, 이쪽 편인가 저쪽 편인가. 그렇게 되면 하나의 사회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둘러쳐지게 되는 겁니다. (중략) 감시사회라는 것은 실로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어 감시를 강화하면 할수록 본래의 목적이 날아가 버리고, 감시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맙니다.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 <도쿄 산책자> 중에서



대한민국 인구 중 절반은 이제 아파트에 사니까 이런 고민을 안 할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주택가에 사니까, 혹시 저처럼 CCTV 설치 고민이 되는 분이 계시면 CCTV가 능사가 아니란 걸 한 번 떠올려 보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라산 눈보라에 겁이 나서 기어가다시피 해서 하산하여, 시장서 장봐서 숙소에서 차려먹은 음식. 운이 따르지 않은 이 여행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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