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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법은 조변 Sep 26. 2023

변호사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란?

변호사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에게 오후 5시 30분은 어떤 의미인가? 야근을 앞두고 한숨을 돌리는 시점인가? 재판을 다녀와서 고객에게 재판경과를 알려주는 시점인가? 자녀 하원을 앞두고 업무를 정리하는 시점인가? 아니면 회식을 앞두고 정신력과 체력을 재정비(?)하는 시점인가?


대학병원에서 오후 5시 30분은 ‘퇴근시각’이다. 일반적인 회사와 달리 오전 8시 30분까지 출근하고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한다. 경북대병원에 처음 출근했던 날인 2015년 3월 9일 오후 5시 35분쯤 컴퓨터를 끄고 퇴근을 했다. 밖이 환할 때 퇴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6시 15분이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생겼다. 주말에도 ‘일(사건)’ 생각을 하지 않고 온전히 쉴 수 있었다. 한동안 약간의 죄책감 같은 기분이 함께 했다. 변호사인 내가 저녁에도 주말에도 편히 쉬어도 되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누군가의 아버지는 인생을 즐겨라고 말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북대병원 라이프를 마냥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로펌과 컨설팅펌에서는 주어지는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면 되는 ‘단순한 삶’을 살았다면, 경북대병원을 다닐 때에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과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는 오로지 나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모교 고등학교 후배들에게 변호사 진로특강을 했다. 후배들이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교에 방문하여 저녁시간에 진로특강을 할 수 있었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변호사가 되는 과정은 어떠한지, 변호사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등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예상보다 변호사를 꿈꾸는 후배들이 많아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진로특강을 했었다.



모교를 자주 방문하는 변호사가 많이 없었던 이유에서 인지, 모교는 나를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로펌, 컨설팅펌 때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 깊이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었는데, 위원회가 자주 개최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석할 때마다 쉽게 진행되었던 적이 없었다.


'형사사건'처럼 피고인을 특정하고 드라이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한 후 법리를 적용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을 구분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사례도 있었고, 괴로워하는 학생은 분명히 있지만 괴롭히는 행동을 특정하는 것부터 어려운 사례도 있었다. 위원회 2년 차에는 위원장을 맡았었는데, 절차적인 적법성을 확보하는 것까지 신경 쓰느라 매번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있다(절차적인 하자가 있을 경우에 그에 따른 결정이 소송이나 심판을 통해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에게 법률상담이 숙명인 것과 같이, 변호사에게 '각종 위원회 활동'도 숙명이다. 나는 모교의 학교폭력자치위원회 외에도 국무총리실 정부국정과제 평가위원, 한국산업인력공단 소비자법 관련 문제출위원을 했었다. 주로 기존 위원이 그만두어 '결원'이 발생하는 경우에, 변호사에게 위촉의 기회가 온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쌓을 수 있고, 그 업계의 실무자를 두루 알게 된다는 점에 특히 개업변호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한편, 또 다른 모교인 경북대 로스쿨에서 '어드바이저'로 활동했다. 지도교수님인 김창록 교수님의 '법조사회학' 강의가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있었는데, 퇴근 후에 강의에 출석(?)하여 교수님과 수강생 사이에서 현직 변호사의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토론하는 역할을 하였다. 로스쿨 수업에서 선배 변호사가 함께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법학에 '재미'를 더하고 '현장감'도 더해 주었다.


교수님의 허락과 관용이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가 로스쿨과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법학교육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교수님이 경험했던 10여 년 전의 법원 분위기도 도움이 되겠지만, 당장 오늘 느꼈던 재판정의 분위기도 공유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병원의 '진료'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부산의 한 사이버대학교 보건행정학과에 학사 편입을 했다. 의학용어, 해부생리학, 병리학, 보건정보관리학, 공중보건학, 원무관리, 국민건강보험론, 요양급여심사청구,  보건의료법규 등 70학점을 이수하고 보건학사를 취득했다. 사이버대학은 강의 출석, 시험, 졸업까지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어 매우 편리했다. 전문분야에 고민이 많다면, 실속 있는 사이버대학 학사편입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경북대병원 근무기간이 2년이 지날 무렵 당시 세브란스병원 법무팀의 박다래 변호사님과 '병원법무실무'를 같이 쓰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의료법 중심으로 단순히 관계법규를 소개하는 책은 있었으나, 병원의 실무자가 현장에서 바로 참고할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박다래 변호사님은 의료행위와 의료인을 중심으로, 나는 보건의료제도 중심으로 병원실무자를 위한 책을 펴냈다.


의료법과 국민건강보험법이 수시로 개정되고, 보건의료정책도 수시로 변경되기 때문에 '병원법무실무'는 다소 낡은 책이 되었지만, 그 당시 책을 썼던 경험 덕분에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박다래 변호사님께 거듭 감사드린다.(참고로, 박다래 변호사님은 대학병원 법무 전반에 관하여 최고 전문가라 생각한다).


갑자기 생긴 '여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매일 저녁을 맥주캔과 함께 프로야구 중계를 보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를 찾아주는 모교에 찾아가 진로특강을 하고, 학폭위원회에 참여했었다. 세종으로 가서 정부의 국정과제를 평가하기도 했고, 울산으로 가서 소비자법 과목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보건행정학 인강을 듣고, 틈틈이 실무서적을 쓰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렇게 여가를 보냈다(생각보다 변호사를 찾는 사람들은 꽤 많이, 꽤 자주 있다).


솔직히 그 시간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시간'을 '나의 의지'대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감히 변호사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1. 경북대병원 변호사가 된 이후, '주어진 일을 하는 삶'에서 벗어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고 있다. 

2. 저녁과 주말에 생긴 여가 시간에는 모교 진로특강, 로스쿨 어드바이저, 각종 위원회 참석, 보건행정학 학사 편입, 저술 활동 등으로 보냈다.

3. 변호사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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