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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편지와 독백 그 사이의 마음으로

by mz교사 나른이

어른이 되어서야 서서히 깨닫곤 해. 친구, 동무, 벗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프며 빛나는 단어인지. 친구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어린 시절엔 삶의 지혜와 성찰의 깊이가 부족해서 깨닫지 못했어. 친구가 이토록 소중한 존재라는 걸. 그때 친구란 그저 살아가는 과정이 심심하지 않게 함께 어울리고 떠드는 사이인 줄로만 알았지. 함께 있으면 웃음이 나오고, 서로 마음이 맞는다는 게, 삶의 고뇌와 행복을 나눠질 사람이 있다는 게 이토록 경이로운 기적인 줄은 몰랐어.


길 것 같지만 사실은 우주의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이 짧은 생애에, 혈연으로 묶이지도 않은 채, 이전엔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남남이었던 우리는 이 넓은 지구에서 우연으로 가장한 인연으로 만났지. 낯선 얼굴이었던 우리가 서서히 서로의 삶에 수채화 물감처럼 스며들고, 숨 가쁜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서로의 안위를 궁금해하곤 해. 슬픈 일에는 따사로운 위로를 건네며 서로의 우산이 되어주고, 기쁜 일에는 서로를 마주 보며 팝콘 같은 웃음을 터뜨리곤 해. 이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귀인이자 손님이 되었네.


우리는 서로에게 환희에 싸인 기적이야. 80억이 넘는 사람이 있는 이 지구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하고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는 건 얼마나 큰 기적이자 축복일까? 겹겹이 겹친 우연과 인연, 기적 끝에 너를 만나게 되어 행복해.


삶이란 때로는 우리의 치열함을 외면하는 것 같고, 왠지 이 세상이 나에게만 각박하다는 서러움이 몰려올 때도 있을 거야.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 나는 그 말에 완벽히 공감한단다. 밀물처럼 쏟아져 밀려오는 분노와 절망 같은 부정의 감정을 가슴속에 꽁꽁 싸맨 채 묻어 두고만 있으면 어느 날엔 터진 둑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솟구칠지도 몰라. 때론 그저 귀 기울여주고, 어깨 한 번 토닥여주고, 꼭 안아주는 게 내 위로의 전부겠지만 그래도 네가 못 견디게 힘들 땐 언제든 내게 와주었으면 좋겠어. 슬픔의 구렁텅이에 잔뜩 적셔져 있을 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될 수 있단다.

입이 간질간질한 기쁜 일이 생겼을 때도 나에게 이야기해 줘. 난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행복해 마땅한 존재인지 알고 있기에 너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줄게. 마주 본 채 서로를 향해 거짓 없는 웃음을 지으며 행복의 보따리를 굽이굽이 펼쳐내 보자. 반짝이는 그 이야기들을 두 손 모아 고이 들어 올리고 소중히 어루만지며 되새김질해 보자. 행복을 함께 부지런히 곱씹어내자. 행복의 은하수에 푹 젖어보자.


때론 추레한 옷차림으로 해 질 녘 동네에서 만나 궁상맞은 이야기들도 나누어 보자. 무릎 나온 추리닝을 맞대어 앉은 채 친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식 없이 깔깔대며 속 시원하니 웃어보자. 조금은 창피한 흑역사도 꺼내놓으며 인간적인 우리의 면모를 만끽하자. 꾸며낸 네 모습도 사랑스럽지만 난 네 솔직하며 담백한 면모를 애정하니까.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진정 우리를 더 가까워지게 할 거야.


혹여나 어느 날 내 무심함이 널 서운하게 한다면 나에게 알려주면 좋겠어. 나도 결점 투성이인 한낱 사람인지라 너의 감정을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하는 때가 있을지 몰라. 그럼에도 네가 나의 부족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고 네 진솔한 마음을 꺼내어 보여준다면 난 조금 더 너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네 감정과 마음, 가치관과 인생관에 대해 약간은 더 박식해지겠지. 이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가며 우린 서로에게 옅고 진하게 물들 거야.


지구의 자전처럼 우리의 일상도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것 같아 때론 무료해지기도 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냈는데, 결국은 그 자리 그대로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아 힘이 풀리기도 해. 하지만 우리 이것만은 잊지 말자.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짧다는 것 말이야. 새해라고 호들갑 떨며 ‘올해는 더 행복하자’, ‘하는 일마다 잘 되면 좋겠다’며 덕담을 주고받은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올해가 중천에 떠올랐잖아. 시간은 뒤꿈치를 들어 올린 채 우리도 모르게 살금살금 쉬지 않고 걸어가겠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저 멀리 걸어 나가 희미해져 있겠지. 그러니 우리, 조금은 삶이 지루하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찾아보자. 집 주변 조용한 카페에서 라테아트가 예쁜 라테 주문해서 홀짝거리기. 즉흥적으로 영화관 가서 영화 보며 마음껏 호들갑 떨어보기. 이런 것마저 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좋아하는 향수 칙칙 뿌린 채로 이불속에 쏙 들어가 드라마 정주행하기, 심심하거나 답답한 날에 속 편하게 수다를 떨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를 걸어도 환영이야. 지루하면서도 바삐 흘러가는 야비한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쟁취해 내자. 우리의 삶이 덧없이 시간에 끌려 다니게 내버려 두지 말자.


우린 말이야, 서로가 서로의 삶에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어.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가끔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언제든 어렵지 않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 삶의 쉼표이자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사이. 각자가 주인공인 삶이라는 무대에서 꽃 한 송이 내밀어 주인공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워주는 그런 조연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친구야, 사랑해. 앞으로도 너의 아름다운 삶을 응원하며 지켜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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