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노트_한 번쯤은 뾰족하게 살아볼걸

나를 정의하는 글에 앞서 써보는 나의 이야기

by 유됴이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다는 것, 그건 내 오랜 고뇌이자 안도였다.


너무 좋아하는 것을 가진 탓에 평생 그것을 쫓아 고달팠던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어서 그런가.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원하는 바의 뒤꽁무니만 간절히 좇는 삶이 아니어서, 평범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순적이게도 모두가 늦었다고 말하는 시기에서조차 용기를 내어 좋아하는 걸 이루고자 삶을 뒤바꾼 이들의 이야기를 존경했다. 그 인물 중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은 바로 나의 오빠이다. 뭔가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나의 이런 성향은 아마 엄마 뱃속에서 한 가지를 뾰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유전자를 다 끌어다가 세상에 먼저 나온 오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혈육은 원래 꽤 좋은 대학의 문과 중 소위 제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경제학사였다. 그런데 이 양반이 군대를 가고 난 후 중반쯤 지났었으려나? 어느 날 집으로 장문의 편지가 왔다. “정말 하고 싶은 게 생겨서, 다니고 있던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봐서 대학에 가고자 한다고. ‘사진’이 하고 싶다”라고 쓰여있었다. 부모님도 몰랐던 오빠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가 놀랐다. 웬만하면 우리의 결정과 생각을 모두 존중해 주시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반대를 했다. “안돼, 자퇴는 허락할 수 없어. 다니던 학교와 이미 흐른 시간이 아깝지 않니? 무조건 졸업은 해. 사진은 일단 취미로 시작해 봐. 좋아하는 건 취미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

평범한 직업을 구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포기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장래를 무작정 응원해 주기엔 이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걸, 세상에 먼저 나와 풍파를 몸소 겪으며 살아 낸 인생 선배로서의 걱정 어린 마음이었으리라.


혹시라도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사진이 계속하고 싶다면 그때 다시 상의해 보는 걸로 오빠의 ‘갑분사(진)’ 선언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오빠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나는 한 명의 방관자로서 오빠도 본인의 꿈에 대해 긴가민가 했던 거라고 쉽사리 넘겨짚었다.


그런데 몇 년 뒤 오빠가 경제학사로서 졸업하던 해, 딱 2명을 뽑는다던 사진학 분야에 한한 가장 권위 있는 대학원의 합격증을 들고 왔다. 오빠의 나이 30줄에 진입하던 때였다. 그렇게 오빠는 주변인들이 슬슬 취직하고 점점 자리를 잡아가던 때에 새로운 분야의 초심자가 되었다. 그것도 순수 예술 작가로서 말이다.


그로부터 5~6년 정도가 지난 지금 “나의 오빠는 작품 한 점 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이름 날리는 예술가가 되었다.”로 이 문단을 끝낼 수 있다면 꽉 찬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는 아직 한창 그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ing 상태이다. 방관자였던 나는 이제 한 명의 지지자로서, 그 끝이 창대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설사 대단한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걸 찾은 오빠는 이미 그 자체로 충만해 보이긴 한다만.




정말 좋아한다는 걸 찾고, 그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가까운 이들 중엔 오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니 꼭 업으로 삼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며 기꺼이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평범한 삶에 안도하고 안주하던 때 다들 언제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된 거지? 그런 이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조바심이 피어났고, 이는 나를 때때로 작아지게 만들었다.


이 조바심은 내가 몸 담았던 브런치 글쓰기 모임에서도 새삼 크게 다가왔다. 첫 번째 브런치 북을 어떤 이야기로 쓸지 한참 고민하던 나와는 달리,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은 모두 자신의 일상이나 취미 영역에서 프로페셔널이 되신 분들이었다. 아주 쉽게 소재를 선택하고서는 쭉쭉 글을 써 내려갔다. 스쿠버 다이버로서, 반려하는 중대형견의 견주로서, 뜨개 작가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구축해 온 자신의 세계를 통해 삶을 풍요롭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나도 중형견을 키우고 있고, 스쿠버 다이빙도, 뜨개도 시도해 본 적 있었는데... 난 왜 그분들처럼 취미나 일상 영역에서라도 뾰족하게 살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회환이 들었다.


잠시 멈춰 서서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어렸을 적부터 취미 붙일 수 있는 일들을 많이도 시도해 봤다. 자각하지 못했던 때조차 뾰족하게 살지 못하고 있단 고민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었나 보다.

피아노, 바이올린, 대학교 응원단, 스쿠버 다이빙, 토론 동아리, 제2외국어 배우기, 각종 운동, 번역, 사격, 발레, 게임, ...


그중 발레와 사격은 내가 뭉뚝하게나마 오랜 기간 지속해오고 있는 취미이다.

사격은 눈이 나빴던 내가 라식 수술을 한 후 시력 자랑 겸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입문하게 된 건데, 어렸을 적 이 재능을 발견했다면 뭔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스갯소리를 해 볼 정도로 꽤 잘한다. 이와는 반대로 발레는 3년 차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못한다. 2년 넘게 발레를 했다고 하면 당연스레 “다리 찢기 잘하겠네요!”들 하지만, 워낙 아픈 걸 싫어하는 나는 다리를 아직도 180도 찢지 못한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너무 컸었던 나는 ‘초보인 나’의 모습을 잘 못 견뎌했다. 그럼에도 발레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건, 발레를 ‘잘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지정해 본 인생 첫 시도 덕분이다.

뾰족하게 살고 싶어서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잘하고 싶어 애를 쓰던 나는 뭐든 잘 지속해오지 못했는데, 오히려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을 먹으니 뭉뚝하게나마 지속해 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잘 하진 못 해도, 나는 발레가 계속 좋다. 그리고 오늘날에서는 가끔 토슈즈(*입문자는 천 슈즈를 신으며, 토슈즈는 흔히 아는 발레리나가 공연할 때 신는 앞코가 딱딱한 슈즈이다. 부상의 위험으로 보통 2년 이상 발레를 지속한 사람들이 신을 수 있다.) 수업을 듣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집에도 1인용 발레바를 들여놔 홈트도 시작했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작은 깨달음이 든다. “어랏? 잠시만.. 이 정도면 뾰족 까진 아니더라도 뵤족 정도는 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나도 한 번은 뾰족하게 살아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생각보다 금방 올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추구하던 삶에 가까워지고 있었나 보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괜히 한 마디 덧붙인다.

뾰족하게 살아볼걸이라는 후회 섞인 제목과 이 긴 글이 무색하게도, 뭉뚝하게 살아온 나도 충분히 괜찮은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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