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쟈 감독, 2024) 리뷰
드라마를 볼 때면 젊은 여배우의 얼굴이 성형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더 손대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기도 하고 외려 손대기 전이 더 예뻤던 경우도 허다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중노년 여배우의 경우도 놀랄 때가 많다. 저 나이에 저런 외모가 가능한가 싶은, 매끈하고 탄력 있는 피부, 흰머리를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한 머리칼, 군살이라고는 없는 날씬한 몸매 등은 나처럼 늙으면 늙는 대로 산다는 주의를 가진 나이 든 여자들에겐 꽤 열패감을 준다. 동시에 저 외모를 유지하느라 얼마나 고될까 안쓰럽기도 하다.
여배우에게 외모와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는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젊은 여배우의 로맨스 상대로 중년의 남배우가 캐스팅되는 기이한 연예계의 구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남배우는 중년이 되고도 젊은 남성으로 분하고 늙어서도 나름의 커리어를 꾸준히 이어가지만, 여배우의 경우는 드물다. 이 지경이니 먹는 나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외모라도 젊고 매력 있게 유지하려는 여배우의 노력은 생존 전략이 되었다.
가뜩이나 입지가 좁아지는 마당에 여배우 나이 50이면 연예계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TV 방송사 오너의 말을 듣게 된다면 당사자 여배우는 어떤 심정이 될까. 의학계 암시장에 존재하는 유전자 조작 이중 자아 프로젝트에 솔깃해지지 않을까. 여성 혐오 발언을 듣고 모욕감에 치를 떨던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마침내 주사 한 방으로 끝나는 위험천만하고 불가역적인 ‘Substance(물질)’ 트윈 자아 프로젝트를 결행하게 된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시작이다.
충격적인데 메시지가 난해하다
영화는 충격적이다. 2021년 해석불가한 충격으로 나를 강타한 영화 <티탄>에 견줄만하다. <티탄>은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차와의 섹스라는 신선하다 못해 상상 초월의 파격적 연출로 경이로움을 선사했는데, <서브스턴스>의 코랄리 파르쟈 감독 또한 강렬한 색채, 전라를 드러내는 과감한 노출, 기괴한 서사로 놀라움을 준다. 여감독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주사 한 방으로 젊은 몸과 자아를 가지게 된다는 판타지성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 <서브스턴스>에 이입하게 되는 까닭은 이 영화의 주연인 데미 무어의 배우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 중년의 관객은 거의 이견 없이 데미 무어하면 영화 <사랑과 영혼>을 떠올릴 것이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주인공 몰리 역의 데미 무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경우 강인한 군인으로 분했던 <지 아이 제인>도 잊을 수 없지만, 대부분 사랑스러운 몰리였던 데미 무어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여배우가 군인이라는 딱딱한 남성적 배역보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절절한 로맨스의 주인공에 더 적합하다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예쁘고 젊은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라는 함의다.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며 그녀를 한달음에 스타덤으로 밀어 올린 로맨스 영화 <사랑과 영혼>이후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뀐 30년도 훨씬 지나 중년의 배우 그것도 퇴락한 여배우의 역할로 돌아온 데미 무어를 보는 관객은 영화를 그녀의 삶과 유리하기 어렵다.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고작 에어로빅 쇼나 하며 ‘자신을 돌보세요’라고 외쳐대는 것도 서러운 판에 이마저도 밀려나게 생겼으니 커리어가 끝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결국 주사를 맞고 또 다른 자아인 수(마가렛 퀄리)를 탄생시킨다.
영화는 둘이자 하나인 즉 엘리자베스이자 수인 두 자아의 공존을 극단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둘의 공존이 결코 조화로울 수 없음을 내포한다. 늙고 피로한 엘리자베스의 1주일과 젊고 에너지 넘치는 수의 1주일이 등가로 균형을 맞추기는 애초 어려웠다. 더 많이 놀고 일하고 주목받고 싶은 수가 1주일을 빡세게 살고 1주일을 죽은 듯 뻗어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자아 수는 과거의 엘리자베스처럼 스타덤에 오른다. 아슬아슬한 에어로빅 복장을 하고 에어로빅인지 성애를 묘사하는 춤인지 헷갈리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렇게 야릇한 춤을 과연 누가 보며 열광할지는 뻔하다. 춤추는 당사자는 그녀지만 쇼를 찍고 이를 즐기는 이들은 남성들이다. 이것이 연예계가 여성 배우나 가수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해온 방식이다. 남성의 구미에 맞추는 성애화된 마케팅 말이다.
이 지점은 하루 이틀이 아닌 고민을 던진다. 대중의 인기를 끌어 사랑받는 스타가 되고자 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성공 방식에 어쩔 수 없이 성애화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나날이 어려지는 걸그룹의 지나친 성애화는 이미 문제지만 개선되기 난망하다. 여배우의 경우 젊어서나 할 수 있는 로맨스 배역이 아니고는 캐릭터 발굴이 어렵고, 근래 OTT 드라마가 보여주는 맥락상 꼭 필요하지도 않은 여배우의 과도한 노출은 어떤 관람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는 의도인지 의심하게 한다.
이러한 여성 연예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그들을 성공으로 견인함과 동시에 시한이 정해져 있는 영광에 집착하게 한다. 언제나 젊음과 마른 몸과 성적 매력을 유지하라는 억압에 시달리게 된다. 더 복잡한 문제는 이들이 겪는 억압이 이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워너비인 수많은 여성들에게 전이되어 과한 다이어트나 성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보편적 여성의 성적 대상화로 이익을 얻는 것은 엘리자베스를 해고한 연예계 보스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다이어트 약 등의 제약 산업 그리고 성형 산업이다.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낼 당사자는 여성이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절의 지난함은 엘리자베스와 수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성애화된 여성 이미지로 막대한 돈을 버는 산업 구조에 기꺼이 이용되도록 적극적으로 공조한 당사자가 성애화된 여성을 욕망하는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여성 자신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마침내 괴물로 변한 엘리자베스이자 수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관객(사회)을 향해 피의 향연을 벌이는 폭력적 피날레가 극적으로 해방감을 주기엔 어딘지 찜찜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너희들이니 흉한 괴물이 된 나도 당연히 사랑해 줘야지 하는 복수심의 이면에는 몬스터가 되어서라도 주목받지 않으면 존재 가치를 부정당한다고 내면화한 욕망이 이색 버전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SNS에, 콘텐츠에, 이제는 AI의 가공할 조작까지 가세해 폭포처럼 쏟아지는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들. 태초에 누가 만들었고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를 묻고 따지는 게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를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재생산하며 끝도 없는 이미지들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어서일까, 영화가 발신하는 메시지를 해석하기 난해해진다.
‘너다워지라’는 둥, ‘너(못생기고 뚱뚱한)를 너대로 사랑하라’는 둥의 긍정 컨설팅이 기만임을 눈치챘고, ‘탈코’를 못생긴 ‘꼴페미’가 벌인 한물간 유행쯤으로 여기는 마당이라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