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별빛서점이란 간판이 보인다. 책방은 언제 보아도 좋다. 길을 가다 책방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이 화들짝 커진다. 엄청 넓다. 책이 있는 공간 너머로 무수히 많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나 큰 북카페가 있구나. 테이블 사이로 멋진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이름 모를 야자수들이 미풍에 하늘거린다.
여기가 실내야? 밖이야? 내 눈동자는 신천지 같은 이곳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넓은 북카페에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더니 모두 이곳에 와 있구나!! 진풍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책 정리를 하던 젊은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소리 없이 들어 와 서 있는 손님에 놀랐는지 순간 젊은 점원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말없이 환한 미소로 인사를 준다. 책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많고 다양하다. 낯선 글자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의 책이 다 있는 듯하다. 별빛서점의 수준을 알아보겠다. 눈앞에 톨스토이의 부활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덥석 빼 들었다. 책장을 열었다. 생각 없이 한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그러다 멈칫했다. 내가 지금 러시아 글을 읽고 있는 거야? 어머, 내가 러시아어를 배웠었나? 아무리 내가 늙어서 총기가 없어졌다 해도 그런 기억은 없다. 다음 페이지를 읽어봤다. 술술 읽힌다. 다른 책을 뽑아봤다. 낯선 제목의 중국 책이다. 제목은 ‘인생’, 펼쳐서 한 페이지를 읽는다. 역시 술술 읽힌다. 분명 중국 글자다.
이게 뭐야? 신기해서 다른 아무 책이나 꺼내 봤다. '독일인의 사랑’이다 역시 막힘없이 읽힌다. '어머나, 내가 원문을 읽네!!' '책 장에 자동번역기 칩이 들어있는 거야?'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황당한 이 상황에 놀라, 이책 저책을 마구잡이로 꺼내 들추어 본다. 그런 나를 보았는지, 점원이 다가와 책을 한 권 내민다.
“도와드릴까요? 이 책은 어떠신가요?”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이 황당한 상황에 머리가 어지럽던 차였는데 반가워서 덥석 받았다. 일본 책이다. ‘현해탄의 우정’ 제목이 고전적이네, 생각하며 작가소개를 봤다. 사진은 없다.
‘쇼스케 겐꼬, 1903 – 1953' 작가의 이름과 생존 기간이다. 프롤로그를 읽어본다.
<<현해탄 건너 친구가 있었다. 그는 동무이며 형이었다. 많이 배운 자는 아니었다. 그는 ‘충의’의 남자였다. 그는 뼛속부터 조선인이었다. 내가 본 조선인 중에서 가장 조선인다웠다. 어린 조선인 창녀를 위해 일본인에게 테러를 당했고, 일본인 나를 위해 조선인에게 칼을 맞았다. 그는 항일투쟁을 하거나 사상적으로 큰 뜻을 품은 자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사람을 귀하게 여겼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사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는 어른이 된 후에 나를 위해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 저쪽에서부터 한 영혼이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어지만 줄줄 읽힌다. 일본어는 배운적이 있어서 조금 알지만 우리나라 글처럼 읽을 수준은 안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다. 암튼, 첫 페이지부터 홀릭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읽다가 가야겠다 생각하고 눈으로 테이블 있는 쪽을 더듬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젊은 점원이 다가와 테이블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한다. 창가 테이블로 가서 의자를 당겨준다. 소소한 듯하지만 이런 친절은 늙은 할미에게는 감동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냥 하늘뿐이다. 솜처럼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하늘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한참을 넋 놓고 보다가 책을 펼쳤다. 앞서 읽은 프롤로그를 넘겼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조선의 경성역이었다. 그는 한눈에 나를 알아보고 내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내 눈에 들어온 그 사내는 족히 서른은 되어 보였다. 그는 내가 인력거에 올라타는 것을 거들어 주려 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다리를 절어도 인력거에 올라탈 때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은 아니다. 그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그런 도움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장으로 보아 작가 쇼스케 겐꼬의 자전적 소설인 듯하다. 젊은 점원이 말랑말랑한 색색의 고물이 묻혀있는 경단 다섯 알과 작은 찻잔에 맑고 푸른 녹차를 담아왔다. 예쁜 경단에 놀라서 감탄하며 점원을 쳐다봤다. 점원은 내가 왜 놀라는지 알겠다는 듯, 한없이 따뜻하고 친절한 미소를 보낸다. 경단은 내 어릴 때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였다.
아버지도 경단을 좋아하셨다.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귀할 때였지만, 엄마는 귀한 찹쌀을 구해서 절구로 빻아 고운 가루로 만들고, 콩, 팥, 깨, 호두, 잣도 가루로 만들어 색색이 준비해 놓았다. 귀한 손님이 오면 찹쌀가루를 꺼내어 즉석에서 반죽을 하고 둥근 새알 모양으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사풋 담궜다가 꺼내어 고명 가루를 듬뿍 묻혀서 서너 알 내어놓았다. 보기에도 얼마나 예쁜지 손님들은 손을 얼른 대지 못할 정도였다. 맛도 맛이지만 엄마의 그 자랑스런 음식이 좋아서 나는 걸핏하면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꼭 두서너 개만 만들어서 나를 달래곤 했었다. 그 귀한 것이, 딱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그 모양새로 나왔다. 엄마는 예쁜 경단 만드는 법을 이모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12살이나 많았다. 말랑말랑한 경단을 입안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으로 번지면서 가슴에는 그리움도 함께 번져갔다. 엄마, 이모 모두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