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존중하는 법
“우리 애, 여자친구 생겼다더라.”
친구의 말에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기침을 했다.
“뭐라고? 누구? 걔가? 중학생이?”
그렇단다. 중학교 2학년 된 친구 아들이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나 여자친구 생겼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주말에 둘이서 영화도 보고 인생 네 컷도 찍으면서 나름 커플답게 데이트를 했다고 한다.
괜히 걱정하는 마음에 “야, 그럼 걔 용돈 다 쓰는 거 아냐?” 하고 툭 내뱉었더니 친구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니야, 데이트 비용은 반반 낸대.”
중학생 커플이 반반 데이트를 한다니... 심지어 영화관 티켓값은 여자친구가 먼저 예약을 한 거라 친구 아들이 영화티켓값 반절을 계좌이체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요즘엔 반반이 대세라더니, 진짜 반반이다.
반반 치킨도 아니고, 반반 연애라니...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 어릴 적만 해도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 데이트는 대부분 남자가 먼저 계산했고 부부 사이에서도 돈 관리는 한 사람이 맡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누가 더 많이 내느냐’보다 ‘가정을 잘 꾸리는가’가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아빠도 그랬다.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면 두툼한 봉투를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고 그 순간, 아빠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 멋있지? 내가 우리 가족 먹여 살리는 사람이야.'
엄마는 그 봉투를 받아 가계부를 쓰고 예금도 하면서 살림도 알뜰하게 꾸려나갔다. 아빠는 월급을 다 엄마에게 드리고 용돈을 타 쓰곤 했다. 요즘 세상 기준으로 보면,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퐁퐁남’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게 이상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책임’이었고 ‘신뢰’였으며 때로는 ‘자부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중학생 커플이 ‘반반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은 단순한 시대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책임지고 챙겨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 한 온라인 카페에서 본 글이 자꾸 생각났다. 결혼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가 쓴 듯한 글이었는데, 요즘 젊은 부부들이 결혼 후에도 반반 생활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하며 이런 말을 했다.
“집세도 반, 생활비도 반, 육아도 반. 그게 무슨 부부냐. 그럴 거면 그냥 룸메이트지.”
글쓴이는 그런 부부 생활에 정이 없고, ‘진짜 가족’ 같지 않다고 느낀 듯했다.
그런데 댓글은 전혀 달랐다.
“저희도 그렇게 삽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각자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생활비 통장에 넣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써요.”
“요즘은 서로 책임지고 존중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요.”
공감하는 댓글이 이어졌고 소수만이 “그래도 부부는 한마음이어야지”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걸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우리 부부도 사실 그렇게 반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각자 월급을 받고, 일정 금액을 생활비로 모은다. 첫째 아이 교육비는 내가, 둘째 아이 학원비는 남편이 맡는다. 누가 먼저 냈는지, 누가 더 많이 냈는지를 따지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눈다. 처음엔 조금 계산적인 게 아닐까 망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편안하고 안정된 방식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이런 방식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니다. 어떤 가정은 한 사람이 전체 재정을 맡는 게 더 익숙하고 정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방식의 우열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에 맞게 존중하며 사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을 ‘정답’이라 여기고 다른 방식을 ‘틀렸다’고 단정하는 태도다. 며칠 전 카페 글쓴이의 말투가 그랬다. 반반으로 사는 부부는 사랑이 없고 계산적이라는 식의 시선 말이다. 그걸 보며 나는 불편했다. 그리고 곧 불편했던 이유가 글쓴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너무 정 없어 보이잖아.”
“사랑하는 사이에 그걸 꼭 따져야 해?”
내가 했던 말들은 사실, 누군가의 선택을 너무 쉽게 재단했던 말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친구 아들의 ‘반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혹시 나는 나와 다른 방식을 속으로 갸웃하며, 이미 꼰대의 시선으로 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사는 방식을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건 괜찮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 진리처럼 남에게 들이밀 때 나는 이미 선을 넘고 있는지도 모른다.
꼰대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방식을 유일한 정답으로 고집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은 변했고 사랑의 모습도 달라졌다. 중요한 건 ‘누가 얼마를 냈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가 얼마나 존중하고 책임을 나누는가이다. 아마 언젠가 내 아이들도 이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나 여자친구랑 오늘 영화보고 밥 먹을거에요. 비용은 반반 내고요.”
그때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 너희 방식대로 예쁜 데이트하렴. 중요한 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