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글러와 레니가 떠나고 코뿔소 무리는 한동안 평화로웠다. 게이드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게이드의 행방을 알았고, 글래디가 게이드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 글래디에 대한 코뿔소들의 믿음이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예전의 모습을 띄었다. 평화롭게 초원에서 풀을 뜯고, 목욕을 하고, 아이들은 모여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기에 바빴다. 그런 평화로운 나날로 며칠이 지났을 때, 사자무리의 습격이 있었다. 코뿔소들이 큰 걱정을 덜어냈지만 이곳은 야생이었다. 사방이 적이었고, 걱정이었다.
코뿔소 무리들은 새로운 우두머리인 와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닥친 위기여서 그렇지 평생을 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코뿔소들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따른 대처는 수 백번도 더 해왔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상대는 사자였다. 사자 또한 사냥의 순간을 수 백번도 더 경험했고, 그때마다 늘 승리해 왔다. 양쪽 모두가 초원에서 살아남는 것에는 배테랑이었다. 사자 한 마리는 어른 코뿔소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런 사자가 무리를 지어 습격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3마리의 사자가 덤빈다면 아무리 코뿔소가 덩치가 크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어린 코뿔소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평소라면 사자는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인간들의 초원 습격에 의해 변화가 생긴 듯했다.
"아이들과 노인들이 앞장서서 달리고, 젊은 코뿔소 들은 뒤를 맡아!! 도망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최대한 대열을 유지한 채로 막아서도록 해봐. 어린 코뿔소들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벌 수 있도록! "
와콤은 생각보다 습격의 규모가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맞서는 전략을 택했다. 예전 같았다면 적당히 도망치다가 사자가 다른 먹잇감을 찾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사자들의 의지처가 달랐다. 절대 먹잇감이 도망친다고 쫒지 않을 것 같지 않았다.
와콤을 달려드는 사자 한 마리를 코뿔로 들이받았다. 사장도 덩치가 있기에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세 마리의 사자가 동시에 와콤을 에워쌌다. 한 마리가 목덜미를 물기 위해 달려들었다. 와콤은 달려든 사자가 목더미를 물려는 순간 통째로 밀어 나무 둥치에 받아 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를 향해 발을 굴렀다. 다른 한 마리가 붙었지만 와콤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들러붙은 사자의 발톱이 등에 꽤 깊은 상처를 내었다. 와콤은 순간적으로 몸을 흔들어 들러붙은 사자를 떼내었다. 발톱에 의해 살이 꽤 뜯겨 나갔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와콤은 떨어져 나간 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자는 날렵하게 옆으로 물러섰고, 와콤은 그 자리를 통해 포위를 벗어남과 동시에 옆에 있던 알렌을 포위하고 있던 사자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다른 젊은 코뿔소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한 두 마리의 사자를 상대하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포위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밀리지는 않고 있지만 상처가 늘어나는 쪽은 코뿔소들이었다. 와콤은 멀리 달아난 코뿔소들을 확인했다.
"이제 최대한 도망치는 방향으로 생각해 퇴로를 만들어!"
젊은 코뿔소들은 퇴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이상 사자들의 포위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한 마리만 노리면 됐다. 한 마리만 날려버리고 그 빈자리를 통해 포위를 벗어나면 됐다. 맞서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코뿔소들에게 훨씬 유리했다.
'퍽! 퍽! 퍽! 퍼벅!'
사방에서 코뿔에 받혀지는 사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씩 코뿔소들은 포위를 벗어났다. 벗어난 코뿔소들은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여 다른 코뿔소들이 포위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포위가 해체된 사자들은 아직 포위를 벗어나지 못한 코뿔소들에게 달려들어 포위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결국 코뿔소 한 마리의 코뿔소가 쓰러졌다. 나머지 코뿔소들이 쓰러진 코뿔소를 도우려 했지만 대부분의 사자들이 쓰러진 코뿔소로 몰려들었다.
"어쩔 수 없어 물러서서 도망쳐!!"
와콤은 소리쳤다. 자칫해서 뛰어들었다가는 피해가 커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다른 코뿔소들을 물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코뿔소들의 뒤를 따랐다. 쓰러진 한 마리의 코뿔소들이 대부분 몰려들고 작은 사자 몇 마리가 끝까지 코뿔소들을 쫒았지만 한 두 마리의 사자는 코뿔소 무리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얼마가지 않아 사자들은 도망친 코뿔소들을 쫒는 것을 멈추었다.
한참을 달린 와콤은 무리가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다. 와콤은 먼저 와 있던 알렌에게 피해 상황을 물었다.
"알렌, 피해가 어느 정도야? "
"어른 코뿔소 하나, 그리고 코바영감님이 안 보여."
"어? 코바영감님이?"
와콤은 놀라서 물었다.
"아무래도 코뿔이 없다 보니 가장 먼저 당한 게 아닐까 생각 돼. 코뿔이 없다면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까. "
코뿔소에게 코뿔은 최소한의 방어수단이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코뿔 하나였다. 커다란 덩치도 힘을 모아 타격할 수 있는 뿔이 없다면 큰 먹잇감에 불과했다.
와콤은 착잡했다. 자신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맡고 처음 있던 습격이었다. 초원 위에선 늘 있던 습격이었고,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겪었던 습격이었다. 그중에서 초원으로 돌아간 코뿔소도 꽤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기 전이었다. 둘의 희생이 자신의 잘못 같았다. 지켜내지 못한 것이 자신의 무능 같았다. 글래디라면, 랭글러라면 다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자신의 등에 선명하게 남은 상처보다 더 쓰렸다.
<23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