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나처럼 기숙사와 서브리스를 전전했던 뉴욕의 좁아터진 싱글 생활에는 전혀 그럴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함께 시카고에 살게 되니, 만나는 사람들 중 나에게 그런 기대감을 비추는 미국 사람들이 꽤 있다. 요즘 한류의 위상으로 한국문화가 인기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이젠 내가 남을 잘 대접해 먹일 것 같은 외모의 둥굴둥글한 아줌마가 되어서다.
한국 요리 잘하세요? 쫩쫩 먹는 시늉 하며 나 잡채 불고기 먹어 봤어요. 한국 요리 먹어보고 싶어요. 어쩌고 저쩌고 이런 이야기를 꽤나 들었다.
외국서 현지인에게 한국요리 대접하는 것이 애국이고 친구 사귀는 방법이긴 하다. 아줌마라고 다 요리 옵션이 달린 건 아니라서. 나는 << 요리 싫어요. 저도 얻어먹고 싶어요. 나 시키지 마세요>> 를 이마빡에 쓰고 다니는 사람.
우리 가족은 집 앞 트레이더 조에 걸어가서 중동식 후무스랑 이탈리안 스프랑 빵 사 먹어요. 차가 없어서 한인마트 거의 못 가거든요.(실제 상황임. 반년 후 메릴랜드에 사시는 친척께서 보다 못해 쓰던 차를 탁송 서비스로 보내 주셨다^^;;)
나는 왜 이런가. 우리 엄마는 15명 정도의 엄마 친구들은 한꺼번에 집에 불러 대접하셨다. 2~3일부터 졸이고 달여 준비하는 손 많이 가는 요리로. 바쁜 회사에 휴가 내고 음식 준비를 도우라고 강요해 난 화딱지가 아직도 남아서인가. 그 유전자는 내게 튕겨 나갔다.
성당 주일학교 아이들을 다 먹이는 큰 손은 언니에게, 베이킹을 배우러 다니는 섬세함은 남동생에게 갔다. 주방에서 삼십 분 이상 서 있으면 왠지 화가 치솟는 나에겐 레토르트와 배달음식이 무기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 딸에게 그래서 엄마는 기승전 외식을 좋아해라는 항변 어린 글 한 단락.
다른 나라에 살아볼 때, 큰 명절에는 식당가도 우수수 닫는다. 그 나라 사람들이 고유의 명절에 먹는 집 음식이 먹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 나도 저런 사유로 전혀 대접한 게 없는데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디너에 남의 화목한 미국 가정에 떼로 초대받기를 바라는 건 날 도둑놈 심보입니다. 당연히 내 돈을 주고 밖에 나가서 사 먹어야 합니다. -_-;;
그럴 때 시카고에서 최고의 명절 만찬은 바로 다운타운 메이시 백화점의 월넛 룸이다. 1905년부터 현재까지 한결같이 영업한 레스토랑이다. 심지어 연중무휴다.
백 년도 전의 초 호화 인테리어, 러시아산 호두나무 패널과 오스트리아산 샹들리에에 아직도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영화 타이타닉호의 만찬에 초대받은 것 같은 업스케일에 고색창연함까지.
월넛 룸의 1905년부터 영업했다는 설명
11월에 갔는데도 이미 크리스마스 장식. 요정 언니들이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요정 가루를 뿌려준다.
평소에는 브런치나 디너 레스토랑이지만 명절 때는 구성이 좀 다르다. 시카고 사람들이 백 년 넘게 먹던 명절 오븐 만찬을 나처럼 집에서 명절 음식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뷔페식으로 서빙해 준다.
명절 때 시내 쇼핑을 마치고 초대형 트리 아래서 가족 식사를 즐기는 것은 시카고 인들의 백 년도 넘은 오랜 전통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 할머니들이 명절에 가족들을 위해 몇 날 며칠의 오랜 준비 시간을 걸쳐 내오는 뭉근하고 거대한 오븐 요리들이 도열해 있다. 이런 특별한 미국 명절 요리를 딱히 본 적도 더욱이 할 줄도 모르는 나 같은 외국인 아줌마에겐 천국이다.
도로변 일층에 있지 않아 백화점 7층 월넛 룸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가, 명절 저녁 알아보다 알게 되었다. 백 년이 넘는 시카고 인들의 명절 전통은 시카고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널리 널리 알려야 하므로 이렇게 꼭 씁니다.
건축가 다니엘 번햄의 구 마셜 필드 백화점, 현 메이시스 백화점
이 월넛 룸이 위치한 메이시 백화점은 한세기도 넘게 마셜 필드 백화점(Marshall Field and Company Building)이었다. 마셜 필드 백화점은 시카고에서 1852년에 시작했다.
건축가 다니엘 번햄에게 의뢰해 이 건물을 1892년에 본점으로 지었다. 이후 시카고 전역과 미 중부에 지점을 확장해 대표적인 중부 백화점 체인이 되었으니, 시카고인의 자부심 같은 토종 백화점이었다.
2006년에 이 백화점이 메이시스에 합병되자, 자존심 강한 시카고 인들의 반대 시위가 격렬했을 정도다.
메이시스 간판을 달고 있지만, 아직도 기둥에는 마셜 필드 앤 컴퍼니 명패가 달려 있고, 시카고 인들도 여전히 그렇게 기억한다. 이 건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의 거대한 티파니 돔 천장. 그리고 바깥의 시계탑이다.
백 년도 넘게 쓰던 이름, 마셜 필드 앤드 컴패니
백화점 한쪽 천장을 꽉 채운 1907년 작 티파니 돔, 보석상 티파니의 아들 티파니 입니다.
메이시스 백화점과는 길 대각선에 다니엘 번햄의 다른 작품, 릴리언스 빌딩(Reliance Building. 1890~95)이 있다. 이 건물은 시카고 건축 학파의 특징, 시카고 윈도라는 방식을 잘 보여준 건물이다.
창문이 긴 디귿자 모양으로 튀어나와 빛을 많이 받아들여 건물 안을 환하게 하고, 임대 면적을 늘리며, 시카고의 너무 센 바람은 막아주고 양 쪽의 창문으로 환기를 하는. 시카고 건축 학파의 프리 커서 격인 작품이라고도 한다.
새하얀 릴리언스 빌딩 전경
긴 디귿자로 툭 튀어나온 것이 시카고 윈도다. 임대면적을 넓히고 빛을 끌어오며 거센 바람에서 적절한 환기가 되는.
릴리언스 빌딩 일층의 엘리베이터 계단 공용 홀, 오리지널 상태로 복원한 리플리카. 지나가는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현재 파인애플 호텔인 릴리언스 빌딩, 복도와 객실마다 시카고의 아이코닉한 릴리언스 빌딩(노란색 부분) 작품이 걸려 있다
릴리안스 빌딩 상층부의 오리지널 손잡이
릴리언스 빌딩 상층부의 오리지널 계단 장식
사실 이 릴리언스 빌딩은 다니엘 번햄의 동업자 루트가 짓다가 죽은 후, 그 자리를 채운 앳우드(Charles Bowler Atwood)라는 건축가의 조합이다. 다니엘 번햄은 회사 사장으로서의 행정적 대변인이라고 보면 된다.
여러 소유주를 거쳐 많이 쇠락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1997~99년 사이의 데일리 시장 하에서 예전 모습을 최대한 살려 복원되었다. 현재 파인애플이란 이름의 호텔인데, 이전 이름은 번햄 호텔이었다. 이 건물 일층 카페 이름이 아직도 앳우드다. 건축의 도시 시카고는 참 여기저기에 건축가 이름을 많이도 붙인다.
같은 이유로 시카고 다운타운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보이는 피셔 빌딩(Fisher Building, 1896)도 역시 다니엘 번햄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앳우드가 디자인했다. 능력있던 앳우드는 루트와 마찬가지로 40대에 죽어 그닥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앳우드는 먼저 죽은 루트의 묘비석을 그다지 루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둘 다 시카고 건축 학파의 근대 철골 마천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들이다.
피셔 빌딩과 고가도로 지하철의 간격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이다
고가도로 지하철역에서 찍은 피셔 빌딩, 테라코타 장식이 많은 네오고딕 스타일이지만 엄연히 20층짜리 철골 빌딩. 수직선의 골기가 강해 보인다.
건축가 다니엘 번햄의 작품에 대한 소개가 너무 미흡하다고 느끼신다면.
시카고파의 미국 고유의 근대 건축이 피어날 때 유럽을 답습한 신고전주의로 이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라 후대인의 평가가 박하기도 하다. (시카고 아키텍쳐 센터의 투어를 수십개 다니며 느낀 시카고인들의 온도차... 루트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을 강조하고 번햄에 대해서는 그냥 번둥번둥.. )
암튼 그는 사업가로서의 자질이 훌륭해 당시 본인의 건축회사에서 대형 리테일 회사의 일을 많이 수주했고, 도시계획가로도 정부 일을 정말 많이, 그리고 잘했다오. (나는 후자에 더 점수를 준다)